학교 주소도 정확히 모르고 유학 온 사람이 있다?!
내가 사는 곳은 방콕의 광역도시권 지역 5개 중 하나로, 서울로 치면 경기도, 부산으로 치면 김해 같은 곳이다. 나는 입학할 학교의 메인 캠퍼스가 방콕이 아니라는 사실을 태국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구글맵에서 봤을 때 방콕 올드타운과 멀지 않았고 의대 캠퍼스는 방콕 내에 있어서, 행정구역 상으로는 서울이지만 외곽에 위치한 강서구나 부산에 속한 기장 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도(Province)가 달랐다. 학교 주소도 정확히 모르고 유학 온 사람 나야 나…
처음 집을 구하러 학교 근처에 왔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외곽도시 특유의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학교의 동쪽 끝 게이트 쪽에서 시작하는 고가도로 앞에는 대형트럭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나중에 교수님께 듣기로는 그곳이 정확히 방콕과 이 도시를 나누는 경계라고 했다. 역시 외곽도시의 특징인 크고 투박한 아웃렛 건물들이 띄엄띄엄 보였고, 곳곳에서 건물 공사가 한창인 한편 아스팔트는 여기저기 파여있었다. 시골이라고 할 순 없지만 묘하게 정비가 안된 풍경, 그리고 아예 화려하거나 주택가가 몰려있는 방콕에 비해서는 조금 삭막한 동네 분위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날 날씨는 비가 쏟아져 내릴 듯 잔뜩 먹구름이 껴있었다. 서울 집을 정리하느라 누적된 피로와 출국 전 치아 치료(무려 8개)로 가만히 있어도 하관 전체가 욱신거렸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방콕 중심가에는 모든 것이 밀집해있어서 최소한으로만 걷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데, 이 도시는 뚜벅이에게 너무 가혹했다. 전에 방콕을 여행할 땐 낮에 10분 이상 걸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동네는 이 더위에 기본으로 2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니…! 설상가상으로 학교 근처 콘도에는 가는 곳마다 빈 방이 없다고 했고 학교까지 가는 길도 너무 멀게만 보였다.
그날 밤, 방콕의 람부뜨리 로드로 돌아온 나는 심란해졌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이 학교의 여러 면이 좋아서 선택한 건 맞지만 내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실수를 했나? 역시 방콕 중심에 있는 그 학교에 갔어야 했나? 아님, 깊게 생각 안 하고 바로 태국으로 정해버린 것 자체가 패착이었나? 소용돌이치는 생각(그리고 아마도 호르몬 공격)으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며칠이 지나자 내가 느낀 당혹감과 복합적인 감정에 대해 스스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방콕이 아닌 곳에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공부할 나라로 이곳을 택한 건 사실 태국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방콕이라는 도시, 정확히는 여행하면서 경험한 방콕의 이미지 때문이었으니까. ‘아, 이건 내가 생각한 게 아닌데?’ 란 생각이 스치자 그간의 기대와 설렘이 순식간에 팍 식는 느낌이었다. 더해서 그동안 나는 외곽도시에 산 적이 없었기 때문에(탄자니아는 예외), 이 도시의 첫인상이 더욱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첫날의 혼돈의 카오스를 뒤로하고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나는 택시를 타고 이 동네로 왔다. 어쨌든 집은 구해야 하니까.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 중개인 5-6명에게 연락했고 다행히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살림살이를 채워 넣으며 안정감을 느끼게 되자 이제 이 동네의 좋은 점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방콕 광역권 도시 중 인구밀도가 가장 낮아 도시의 혼잡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당연히 방콕에 비해 땅값이 싸기 때문에 수영장이 딸린 쾌적한 콘도를 저렴한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딜 가든 나무와 숲, 작은 연못들이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캠퍼스가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다. 앞으로 나에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될 이 동네의 귀엽고 멋진 점들을 하나씩 더 발견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