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밍 Nov 08. 2022

죄책감과 불만족의 바다에서 나를 지키기

대학원생... 원래 이런 건가요

요즘따라 부쩍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공부를 안 하면 "관광대국" 태국에 사는 이점을 누리며 매주 놀러 다니기라도 해야 할 텐데, 공부를 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태국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태국어는 석 달째 제자리걸음이고 태국인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교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태국에 왔다고 나라는 인간이 갑자기 바뀔 리가 있나... 내가 조금 더 활발한 사람이었다면 학교 체육관이나 자주 가는 식당에서도 얼마든지 서툰 태국어로 넉살 좋게 말을 건네고 친구를 만들 수 있었겠지? 하.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고 내가 똥멍청이 같다는 자기혐오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이겨내야지. 


놀면서도 마음 한켠엔 과제와 리딩이 신경 쓰이기 때문에 죄책감이 있고, 설탕이 많이 들어간 태국의 달달~한 음식과 음료를 매일 먹으면서 죄책감을 느끼고(근데 또 안 먹기엔 입이 심심하다우), 주말이 끝나갈 때쯤엔 방콕 시내나 타 지역으로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못한 게으름을 탓하며 또 죄책감을 느낀다(근데 정말 과제하기도 바쁘다구...). 불만족스러운 것도 많다. 내가 다니는 학과는 개설된 지 5년 정도 됐는데, 협동과정의 특수성과 아직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학과 운영이나 강의 구성에 허술한 지점이 자꾸 보인다. 석사과정에서 한 학기에 2학점짜리 수업을 여섯 과목이나 들어야 하는 것, 그중 두 과목 정도는 '이게 뭐지?'싶은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수업 구성이라는 것, (한국도 마찬가지이긴 하겠지만) 교수님들 중 두어 분은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능숙하지 않다는 것도.


이런 얘기를 유학 경험이 있는 언니들, 그리고 현재 유학 중인 친구들과 나누는 도중에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바로 그건 내가 어느 곳에서든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만족감을 잘 느끼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지만,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구린 구석'을 잘 찾아내곤 했다. 달리 말하면 개선할 부분을 잘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생활에서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높은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맞추려고 나를 갈아 넣은 덕분에 인정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신건강엔 좋지 않다. 한 5년 전쯤부터 그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스트레스 상황이 되자 또 나의 본성이 나왔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그게 바로 나야 나. 'All or Nothing'만 있다. 열개 중에 한 두 가지만 마음에 안 들어도 '전부 별로'인 걸로 인식해버린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 더 혹독하다. 한두 가지만 잘 못해도 '엉망진창'이라고 판사봉을 땅땅땅 쳐버린다. 


어쩌면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감사함'이 부족했던 걸까? 한두 개의 불만족스러운 면을 파고들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만족스러운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저렴한 물가 덕분에 돈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것,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등록금만 따졌을 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영미권 학교의 1/10 비용으로 석사를 하고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줄어가는 잔고를 보며 '빨리 일 해야겠다'라고 조바심을 느끼는 것만큼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는데, 아직은 돈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그것도 좋은 점이다. 학과 동기들 모두에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별생각 없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도 내게는 큰 발전이다. 업무에서 영어를 10년 동안 썼는데도 울렁증이 있었는데(완벽하지 않다는 강박 탓), 여기 와서 다양한 악센트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영어 울렁증이 나았다. 저렴한 비용으로 인생에 없던 PT를,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매주 2회씩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다! 그리고 진짜 별거 아니긴 한데 집에서 망고랑 드래곤 프룻을 후식으로 먹을 때 진심으로 만족의 극치를 느낀다.(망고만 양껏 먹어도 본전 뽑지 않을까...?)


지난 3주 정도를 몰아치는 텀페이퍼와 과제로 정신없이 보내다가 오늘 모처럼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유가 있다고 해도 놀 수 있는 건 아니고 텀페이퍼 주제를 정하기 위해 논문을 좀 보고 있는데, '써야만 하는 것'과 '읽어야만 하는 것'들 사이에서 오래간만에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논문을 검색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아, 맞아, 내가 이런 걸 좋아했지! 내가 이런 걸 공부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거지! 아직은 내 흥미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이 든다. 그냥 조금 피곤했던 것뿐이고, 아직 내게 재밌는 것들이 많구나! '재밌다', '흥미롭다'는 이 감정이 너무 소중해서 유리구슬 같은 곳에다 봉인해두고 싶을 정도다. 


죄책감과 불만족의 바다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래서 나를 잃지 않는 것 아닐까? 못해낸 것보다는 해낸 것에 집중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들 가운데에서 나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들을 매분 매초 느끼며 살아가다 보면 또 어느새 모든 게 괜찮아지지 않을까? 만족의 역치를 낮추는 것이 대행복시대를 여는 비밀의 열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제 다시 논문을 찾으러 가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석의 영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