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9일 차

휴직 후 바빴던 일상을 돌아보며

by 스위밍

바빴다. 그러니까 추석 연휴가 체 끝나기도 전인 화요일에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와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목-금, 이틀간의 출근.


목요일엔 함께 일하던 팀 막내에게 인수인계 겸 업무 총정리를 했다.

"이 업무의 목적은 뭐지? 이 가이드라인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해?"

"누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주면 좋을까?"

못내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시험 전 벼락치기를 하듯 문답을 이어나갔다. 나 없이 남은 업무를 정리해야 할 막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가 전문가니까 누가 물어봐도, 뭐라고 해도 이렇게 답해줘. 우린 잘 해왔어. 마무리 잘할 수 있겠지?" 라며 함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어서 인간미 없는 인수인계서를 과하게 자세하게 완성하여 뱉어내고 - 무슨 일이 있어도 휴직 후 결코 나에게 연락하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아 - 컴퓨터 파일 정리도 마쳤다. 그리고는 퇴근하자마자 잽싸게 뛰어 이사 갈 전셋집 계약을 마치고, 다시 회사 근처로 또 헐레벌떡 와서는 예약되어 있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헥헥) 사람들에게 줄 마지막 편지를 썼다. 무려 새벽 세시 반까지. 이것이야말로 미리 준비 안 한 자의 최후라고 생각하며, 아, 나라는 인간, 이 미루는 병! 이라고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 정리 못하는 자의 최후는 마지막 날 재앙 수준으로 드러난다. 마지막 날인데 아직도 책상과 서랍 정리를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출근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자료를 정리했다. 파쇄할 자료 반, 재활용 통으로 들어갈 자료가 반이었다. 무슨 자료는 이렇게 많이 뽑아서 쟁여뒀었는지. 읽지도 않으면서. 그 와중에 점심시간엔 전셋집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뛰어갔다. 인터넷으로 신청한 확정일자가 나오자마자 준비한 서류를 모두 들고, 김밥 한 줄을 우물거리면서. 은행 창구에 앉아있는데 순간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당황한 은행 직원이 괜찮으시냐며 비타500과 초코쿠키를 줬다. 비타500을 원샷하며, 근무 마지막 날에, 우아하게 감상에 젖어있어도 될 판국에, 막날까지 정말 대박이다,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온 사무실.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최종적으로 파일 백업과 컴퓨터 포맷까지 마치고 나니 퇴근시간이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가방에 챙기고, 전날 잠 못 자며 쓴 카드를 사람들 책상에 하나하나 올려놓고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한잔하자며 모여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새벽 세시 반까지 놀았다. 롤링페이퍼와 출장지에서 함께 고생한 경험이 있는 동료의 와인 선물까지. 이 사람들과 함께라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부산에서 친구의 결혼식이 있어 아침 10시 ktx를 탔다. 숙취를 이기고자 기차 안에서 헛개수 한통을 벌컥벌컥 마시며. 코피가 안 난 게 다행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얼굴에 뭔갈 좀 찍어 바르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야외 결혼식이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급하게 실내로 옮겨졌다. 5시 결혼식을 마치고 이어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 집에 오니 두시가 넘었다. 정말 너무 피곤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다음날. 12시까지 죽은 듯 자고, 가족들과 광안리에서 전복구이를 먹고, 송정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며칠 만에 제대로 눈이 좀 떠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숙면.


마침내 10월 1일. 공식적인 백수로서의 첫날이었다. 명절에만 잠깐씩 만났던 친구들을 차례로 만나고, 때마침 열리고 있는 BIFF 영화도 보고, 비엔날레도 갔-다가 하필 휴관일이라 을숙도 공원만 구경하고, 조카와 놀고. 그렇게 1주일을 탱자탱자 놀고 나니, 10월 9일, 오늘이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왔고 내일은 은행과 한의원엘, 모레엔 정신과 상담과 사무실 또 다른 막내와의 약속이 예정되어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아직은 휴식이라는 걸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긴 휴가를 온 기분이다. 나에게 휴식은 집 밖에 안 나가고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를 종일 보는 것,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하고 차를 마시는 것, 좋아하는 음악이나 뮤직비디오를 계속 틀어두고 멍 때리는 것, 이기에. 다음 주까지는 또 이사 준비를 해야 하고, 이사 후엔 이삿집 정리를 (...) 본격적인 휴식은 11월부터일 것 같다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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