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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Feb 21. 2020

어떤 날 퇴근길에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리서치와 행사 지원, sns 계정 운영까지 별별 일을 다 했지만 주 업무는 프로젝트의 회계 보고서 검토, 그러니까 영수증을 보는 일이었다. 연 예산이 5억 쯤 되는 프로젝트였다. 예산이 5억이니 영수증 금액의 합도 5억이었다. 5억 원어치의 영수증. 나는 수백 장의 영수증이 지출내역과 일치하는지, 회계 지침을 따르는 적격증빙인지 따져봐야 했다.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의 영수증을 다 보고 나면 다른 프로젝트의 검토를 도왔다. 인턴으로 일했던 1년 동안 10억 원어치 쯤을 본 것 같다.


영수증은 500원짜리 환타를 산 내역부터 몇 천만 원짜리 건축 입찰 서류까지 다양했고, 알 수 없는 문자나 숫자로 가득했다. 어떤 나라의 시골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았고 우리와 다른 달력을 사용했다. 한 해가 13월까지 있었고 예수가 아니라 싯다르타의 탄생을 기준으로 연도를 셌다. 나는 먼 나라에서 온 암호 같은 종이 조각들을 종일 들여다보며 쌀집 계산기를 두들겼다. 인턴이 하는 일이란 게 으레 그러하듯, 별 볼 일 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아도 엑셀 화면이 어른거리고 뒷목이 뻐근해질 때면 책상에 앉은 채로 가본 적 없는 그 먼 나라를 상상했다. 거기에선 무슨 일이, 어떤 하루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카드 내역서가 한 사람의 생활과 취향을 거짓 없이 보여주듯, 손때 묻은 영수증 꾸러미에는 프로젝트의 면면이 담겨 있었다.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물품 구매의 연속이었다. 주유를 하고 인쇄용지를 사고 휴대전화 선불카드를 충전하고 사무실 전기세를 내는. 차량은 자주 고장이 나는지 수리비가 엄청났고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제너레이터를 추가로 구매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 텃밭을 가꿔 급식을 제공하기 위해 조리도구와 퇴비를 산 내역도 있었다. 시내에서 기름을 넣고 타운을 돌며 조리 도구를 사고 십수키로를 달려, 때로는 배를 타고 학교에 갔구나. 나는 숫자를 따라가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짐작했다. 숫자 속에는 사람도 있었다. 급여 내역을 보다가 회계직원이 출산휴가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3개월 후 급여 테이블에 그 직원의 이름이 다시 보이면 반가움과 동시에 마음이 짠했다. 이제 본격 워킹맘 생활 시작이구나, 대단하다.

8년이 지났고, 나는 스물여섯에서 서른넷이 되었다. 이 일을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는데. 중간에 백수 상태로 구직활동을 하기도 하고 휴직을 하기도 했다.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여전히 별별일을 다 하면서, 리서치와 보고자료와 ppt를 만들면서, 하지만 어쩐지 영수증을 볼 일은 없는 채로. 5년 동안 한 팀에서 같은 일을 하다, 이제 영수증 비슷한 걸 볼 수 있는 팀으로 왔다. 사업 제안서를 채 읽지도 못했는데 예산 변경과 이월금 처리 메일이 속속 도착했다. 아침마다 메일을 여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텍스트를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로 숫자만 가득한 엑셀 파일을 열었다. 난 회계학 원리와 재무회계에서 모두 D를 받았을 정도로 수 개념이 부족한데. 저기, 아직 나는 적응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한데. 하지만 학습지를 풀듯 차근차근 레벨업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방에서 날아오는 테니스 공을 팡팡 받아쳐내며 하는 게 일이지.

파트너 기관 담당자가 보내온 이메일엔 작년 사업비 중 남은 인건비를 이월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운전기사를 새로 뽑고 운영지원 직원들의 인건비도 올려야 한다고 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인건비는 이월이 안되는데, 무슨 이유일까. 팔짱을 끼고 예산 변경 요청서와 지난 분기 지출내역을 살펴본다. 아아, 드라이버 Dao씨에게 야근 수당이 이렇게 많이 나갔네. 아저씨 혼자서는 역부족이었겠구나. 그래, 한 명 더 뽑아야지. 오, 회계 담당 인턴이 정직원으로 승진했구나, 일을 잘하는 친구였나 보다. 4월에는 라오스 설이 있으니 기본급 100%로 명절 보너스를 받는구나. 부럽다. 나는 8년 전 그때처럼 아직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한 ‘프로젝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들어있나. 제안서에 기록되는 사업 참여자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보고서를 쓰고 엑셀 시트를 매의 눈으로 살펴보는 이들. 이 안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월급이, 야근수당이, 명절 보너스가, 그러니까 평범한 하루가 담겨있다. 변화는 국제개발사업의  결과로써  ‘target population’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곳곳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종료 보고서나 평가 보고서에 화려한 통계와 눈물 나게 감동적인 사례로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그런 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결과로,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일로 드러난다.


늦은 밤, 8년 전 그때처럼 마지막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문득 여기까지 온 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영어 울렁증이 조금 나아졌고 너무 애쓰지 않는 연습을 했고 적당히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다. 내가 하는 일로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길 바라지만 그건 오만일지 모른다. 다만 나 하나 정도는 조금 더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이어폰을 꽂고 습관적으로 팟캐스트를 재생하자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특집 방송 ‘Live at the BBC’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 8년은 아직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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