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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Jun 28. 2020

눈 한번 감지 않고 태양에게 걸어가네

어제는 오후 내내 해변에 앉아 서퍼들을 바라봤다. 오전 서핑 강습은 몇 번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는 걸로 끝나고, 자유 서핑은 보드 위에 엎드려 누워있거나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등 뒤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와 진동에 기합을 잔뜩 넣었다가, 한참 멀리서 하얗게 부서져 내 곁에는 작은 물결만 남은 것에 안심했다가, 순식간에 더 큰 파도가 나를 덮쳐 바다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보드가 뒤집혀 몸에서 멀어지고 파도는 계속해서 밀려왔다. 래쉬를 당겨 보드에 겨우 다시 올라타고 뭍을 향해 패들링했다. 나가야 한다, 밖으로. 인생보다 무거운 것 같은 서핑보드를 골반에 받쳐 들고 겨우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안도감에 힘이 풀린다. 보드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이완한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이 녀석을 백사장에서 질질 끌고 서핑샵 근처로 간다. 패들링 탓인지 팔이 천근만근이다. 정수리에 낀 모래 알갱이들을 겨우 빼내며 샤워를 마쳤다. 젖은 머리로 서핑샵에서 운영하는 카페 겸 바에 앉아 핫도그와 콜라를 시켰다. 오후 세 시가 넘어 먹는 첫 끼였다. 이십 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의 피부색은 21호가 아닌 23호였다. 21호든 23호든 파운데이션을 얹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피부엔 윤기가 반지르르했다. 이런 곳에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그린 눈썹과 매트 립이 어쩐지 촌스러워진다. 나는 선크림과 립밤만 바른 내 얼굴이 마음에 든다. 눈밑과 광대뼈에 흩어진 주근깨가 오늘따라 멋져 보인다. 핫도그를 단숨에 씹어 삼키고 맥주를 시켰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코로나 맥주가 있었지만 만 원짜리 빅웨이브를 시켰다. 맥주병 라벨에 그려진 파도가 무서웠지만 또 반가웠다.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며 먼바다에서 점점이 움직이는 서퍼들을 바라봤다. 이윽고 한 무리의 다른 서퍼들이 막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 내 곁을 지나갔다. 모두가 그을린 피부에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몸이었다. 서핑보드를 끼고 성큼성큼 몇 걸음만에 해변을 가로질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몸에 꼭 맞은 웻슈트를 입은 그들은 돌고래처럼 거침없이 패들링을 하며 바다로 나아가더니 순식간에 파도를 기다리는 라인업에 도착했다. 눈 한번 감지 않고 태양에게 걸어가네. 언젠가 들었던 노래 가사 한 줄이 떠올랐다. 서핑에 대한 내 동경의 근원이 파도를 타는 것이 아닌 파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서핑은 내가 그동안 찔끔찔끔 해온 이런저런 해양, 지상 액티비티와 달랐다. 스쿠버다이빙은 하강과 상승 때만 파도를 경험하고 바닷속은 엄청난 조류가 있지 않는 한 고요하다. 트레킹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숨이 가빠지지만 파도와 달리 끝이 있다는 걸 안다. 스노보드는 하강할 때 가속도가 붙으면 겁이 나지만 올라갈 때는 리프트에 앉기만 하면 그만이다. 달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이 차지만 내가 멈춰 서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하지만 서핑은 정방향으로 파도를 타기 위해 계속해서 밀려오는 역방향의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파도를 정면으로 맞지 않기 위해 보드에서 몸을 떼거나 길을 우회하며, 하지만 어쨌든 끝도 시작도 없으며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파도 위를 널빤지 하나에 올라탄 채로. 그걸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었다. 구릿빛 피부와 매끈한 선은 그걸 해낸 이들의 몸에 남은 정직한 기록이었다. 두려움을 극복, 아니 두려움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패들링하고, 좋은 파도가 오는 순간 망설임 없이 일어나 균형을 잡는 것.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혹은 가지고 싶은 삶의 태도였다. 저녁까지 서퍼들은 바다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사이 나는 럼콕 한 잔을 더 비우고 단편소설 네 편을 읽었다. 여름 해가 길어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밖이 훤했다. 나는 곧장 숙소로 돌아가려다 백사장에 좀 더 앉아있기로 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걷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털썩 앉았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만 있어도 몸이 넘실거리는 기분이었다. 레디, 업! 파도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머릿 속으로 테이크오프 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건 아마 낮부터 술을 마셔서였을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고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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