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부영하다 12월 31일도 1월 1일도 넘겨버렸다. 오늘은 낮잠을 푹 잔 탓에 자정이 넘었는데도 말똥말똥하다. 맑은 정신으로 정리해보는 2020년의 생각들.
1.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잘하는 건 바라지도 않고) 구리지 않은 정도의 퀄리티로 계속하고 싶다. 올해, 아 작년은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30주년을 맞은 해였다. 그동안 간간히 배캠을 들어왔는데, 작년엔 거의 매일을 배철수 아저씨 목소리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같은 일을 한결같이 30년 동안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이렇게 멋지게 늙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나도 나이가 들면 철수 아저씨처럼 "허허, 그런가요? 뭐 그럴 수도 있죠"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를 헛 먹지 않고 잘 늙고 싶다.
2.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이 정지해있으면 생각도 감정도 어딘가에 고여서 썩는다. 올해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스트레스 관리에 아주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효과가 있었다. 스트레스 '관리'라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았는데, 지난 몇 년 간 스트레스는 관리하는 게 맞다는 걸 느꼈다. 근데 달리기는 뭐 그런 효용의 측면을 떠나서, 그냥 뛰면 기분이 좋크든요. 작년 내 멘탈 케어는 나이키 앱이랑 내 두 다리가 했다.
3. 기분은 지나간다. 2번과도 연결되는데, 안 좋은 상황이나 기분에 몰두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 증말 거지 같네'라고 생각하고 넘겼고, 그래도 계속 안 좋은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달리거나 덮어두고 자버렸다. 그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나아졌다. 앞으로도 감정에 멱살 잡혀 끌려다니지 않을 거야. 밸런스, 밸런스, 마음의 평정, 인생의 진리지.
4. 자기 연민은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내가 내 인생의 피해자일 수 있을까.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피해자로 산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불행, 혹은 일상의 작은 실패들 속에서 자신을 무력하고 순진한 순백의 희생자로 포지셔닝한다. 자신을 본인 삶의 피해자로 만들면 사는 게 오히려 쉬워진다. 강력한 자기 연민이 책임회피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너무 냉정하게 들리려나. 사람은 모두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존재들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너무 가여워하면 되려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을 기회로부터 멀어진다. 자기 삶에 너무 많은 서사를 부여하거나, 비장미를 보태어 설명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종류의 씩씩함을 가지고 있는데, 긍정성이나 낙관성, 혹은 결연한 의지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에이 시발, 근데 어쩔 수 있나.' 식의 태도에 가깝다. 배우 윤여정 씨가 ‘정말 별로인 작품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시냐’는 질문에 "똥 밟은 셈 치고 한다."라고 답한 걸 좋아하는데, 여러모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그래도 하다 보면 또 얻는 게 있다"라고도 했는데, 그 말도 맞는 말이다.
5. "인생의 정말 좋은 것들은 억지로 부를 수는 없는 법.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 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여름쯤 잠시 코로나 상황이 괜찮아졌을 때 스트레인지 프룻 10주년 공연에 갔다. 정말 오랜만에 김목인과 김일두의 노래를 들었고, '오늘이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노래를 따라 부를 수도, 마스크를 벗을 수도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냥 그 여름밤이 행복했다. 올해도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대로 뮤즈를 불러낼 수도 없겠지만, 매일의 할 일을 하며 살다 보면 어느 날엔 문득 행복을 느낄 수 있겠지. 뭘 했는지, 누가 했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매일 내 나름의 연주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어느 밤 작은 카페에 뮤즈가 다녀갔고,
몇몇 사람들은 그걸 기억하고 있지.
“누가 연주를 했길래?” “뭘 연주를 했길래?”
“아냐,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어.”
어느 순간 모두의 마음속으로.
모든 이들 나름의 연주 속으로.
낮이 되자 사람들은 그 느낌을 얘기했지만
뭐라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
카페의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런 밤이 다시 오길 기다리지.
인생의 정말 좋은 것들은
억지로 부를 수는 없는 법.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
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어느 순간 모두의 마음속으로!
모든 이들 나름의 연주 속으로!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
뮤즈가 다녀간 흔적이 남을 뿐.
- 김목인, 뮤즈가 다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