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밍 Jul 15. 2021

클리셰지만 괜찮아

남의 결혼식에서 울어도 괜찮고

나는 신파와 클리셰를 싫어하지만 누구보다 신파와 클리셰에 잘 넘어간다. ‘하… 너무 뻔한 전개잖아’라고 팔짱을 꼈다가 조금 지나면 코가 찡하고 눈물이 줄줄 흘러 훌쩍대기 바쁘다. <동물농장>이나 <세상의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무조건 울고, <인간극장>은 거의 통곡하며 본다. 내 눈물은 ‘슬프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망치로 치면 튀어 오르는 무릎반사 수준으로 왈칵 쏟아진다. 이 정도면 그냥 다한증이랑 비슷한 거라고 보는 게 낫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우는 걸 주변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어차피 울음을 참을 순 없기 때문에 기왕 운다면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뭐 그게 내 맘대로 잘 되진 않는다. 


그중 제일은 남의 결혼식에서 우는 건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결혼식에서도 나는 그렇게 눈물이 난다. 결혼식이라는 게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도 아니고, 식이 진행되든 말든 뒤에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인사를 나누고, 어디서 하든 똑같은 순서로 진행해서 차이점이라곤 없는데도 말이다. 식전에 스크린에 띄워진 신랑 신부의 어릴 적 사진을 보다 보면 ‘각자의 길을 걸어오던 두 사람이 만나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까?’ 싶어 뭉클하고,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포옹하는 순간에는 눈물이 분수처럼 팡 터진다. 친언니의 결혼식에선 당사자인 언니나 엄마는 안 우는데 나 혼자 오열했고, 친구가 결혼할 때 축사를 하다 말을 제대로 못 이을 정도로 울어서 분위기가 이상해 질뻔한 적도 있다. (쟤 왜 저래? 웅성웅성)


지난 토요일에 나의 ex-동거인이 결혼했다. 따져본 적이 없는데, 내년이면 우리가 알고 지낸지도 10년째다. 내 첫 직장의 면접 대기실에서 처음 만났으니 사회생활의 시작을 이 친구와 함께한 것이다. 결혼식이 열리는 대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 옆사람에게 눈치가 좀 보였다. 식장에 도착해서 친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신부 대기실에 있는 친구와 사진도 잘 찍었다. 본식이 시작되었고, 한복을 맞춰 입은 신랑 신부의 어머니들이 입장하여 화촉 점화를 하고, 신랑이 씩씩하게 걸어 나가고,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남편과 나란히 섰다. 혼인예배로 진행된 결혼식은 평범하고 무난하게 흘러갔다. 성경 말씀을 읽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순서에 따라 축가가 이어졌다. 노래가 끝나자 축가를 한 지인은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고, 깜짝 이벤트로 신랑이 마이크를 넘겨받아 신부를 위한 노래를 시작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로 시작하는 윤종신의 <오르막길>. 신랑의 서프라이즈 이벤트도, 윤종신의 ‘오르막길’이라는 노래도, 다른 결혼식에서 열 번쯤은 본 듯한 전개였지만 주책없이 내 땀 같은 눈물이 또 흐르기 시작했다(내 땀 땀 눈물…). 신랑이 ‘결혼식 축가 1주일 마스터 보컬 레슨’ 같은 걸 받고 온 듯 정직하게 노래를 불렀는데, 그 긴장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 웃었다 울었다 왔다 갔다 하는 친구의 표정, 그리고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라는 노래 가사 3박자가 어우러져, 내 신랑도 아닌데 내가 친구보다 더 운 것 같다(친구는 모를 테지만).


나는 왜 이런 클리셰에 매번 흔들리는 것일까. 그 뻔한 이야기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감정, 혹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인생의 한 장면을 불러온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지만 태어나 죽음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며 삶이 흘러가니까. 결혼식은 클리셰의 종합 선물셋트인 동시에 보편적인 감정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사랑을 맹세하는 신랑 신부의 떨림, 감사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부모님에 대한 감정,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상과 다가올 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 같은 것들. 예식장은 공장처럼 결혼식을 찍어내지만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생각하면 하늘 아래 같은 결혼식이 없고, 보편적인 결혼식은 그렇게 그들만의 특수성을 획득한다. 


뻔한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결혼식에서만큼은 주인공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구태의연한 문장으로 끝맺길 바란다. 그 지루한 결말, 꽉 닫힌 엔딩에 한 인생의 재미와 감동이 모두 담길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흔하디 흔한 문장. <동물농장>으로 치면 “OO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내레이션. 내 친구가 그려갈 앞으로의 날들이 아주 뻔한 클리셰이기를, 흔한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2020년의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