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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Oct 04. 2020

LOVE & ANXIETY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1. 

나는 내가 어딘가 고장 난 인간이라는 걸 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하는 멀쩡한 한 인간, 잘 자란 성인을 연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어느 곳이 망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 대부분, 혹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걸 안다. 우린 모두 불완전하고, 그런 인간들이 불완전한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고 우주고 그런 거 아닐까.


2. 

연애 초기 만큼 내가 삐그덕거리는 인간이라는 걸 여실히 느낄 때가 또 없다. 설렘과 불안, 흥분과 긴장 같은 것들이 섞여 머릿속이 어지럽다. 여러 가지 불안이 나를 찾아온다. 나는 내 인생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이 시즌2에 가서야 정체를 드러내는 빌런은 아닐까 의심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이 웃는 얼굴, 이 따뜻한 눈빛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생각하면서. 


3. 

나는 평화롭던 나의 세계가 흔들리는 걸 느낀다. 혼자로도 충분했던 일상이 낯선 사람 하나의 등장으로 불완전해진다. 새로운 사람은 온전한 나에게 더해진 플러스알파 값이어야 하는데, 연애를 시작하면 하나가 아닌 둘이 새로운 디폴트 값이 되곤 한다. 나 하나로 온전했는데, 어느새 그 사람을 뺀 나는 결핍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겨우 궤도에 올려놓은 '안정적인 나'가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그 변화와 불안이 싫어서 저항해본다. 내 일상을 더 잘 지켜내리라 부러 다짐하고, '나는 나 너는 너'일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잠시 어깨는 빌릴 수 있지만 언제든 팔짱을 풀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의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언제까지나 독립적인 개인으로 남으려 애쓴다. 그게 성숙한 연애, 어른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4. 하지만 그건 일종의 강박이었다는 걸 얼마 전에 책을 읽다 깨달았다.  

나는 성숙한 사랑에 집착했다. "넌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라는 말은 오랫동안 내 사랑의 만트라였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약속 시간에 30분씩 늦곤 해서 엄청 짜증이 났는데도, 상대가 말하는 미래에 내 모습이 없는데도, 다른 여자와 입 맞추고 왔는데도. 대화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려 이 악물고 노력했다. 사랑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내가 자꾸자꾸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사랑은 그렇게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만 그게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 뿐.
- 서늘한 여름밤,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중에서

(이 책을 읽다 감정이 격해져서 몇 번이나 책장을 덮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는데, 특히나 위에서 인용한 대목에서는 거의 꺼이꺼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첫 연애부터 성숙한 연애라는 환상 혹은 강박을 좇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연애의 '퀄리티 스탠더드'를 만들어냈다. 서운해하면 안 돼. 의존적이면 안돼. 혼자 있는 시간도 잘 보낼 줄 알아야지. 삐지고 서운해하는 건 미성숙해.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잘못된 거야. 내가 이해해야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선 안돼. 항상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대화로 갈등을 풀어나가야 해. 내가 만든 가이드라인 안에서 운신의 폭은 줄어들었지만 나는 성실하게 그 규칙을 따랐다. 왜냐면 나는 연애를 잘하고 싶었거든. 마음에 흠집 한 번 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거든.   


하지만 사실 나는 애처럼 굴고 투정 부리고 싶었던 걸까. 껌딱지처럼 등에 매달려 종일 붙어있고 싶었던 걸까. 사실 나는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씩씩한 사람 아니라고, 독립적인 거 개나 주라고, 나만 좋아해 달라고 질척거리고 싶었던 걸까. 당시의 내가 뭘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에 없는 걸 보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였는 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만든 금기를 깨뜨리지 않는 것에만 몰두했다. 징징대면 나에게 질릴까 봐, '넌 내가 생각한 멋진 여자가 아니구나' 라며 상대가 돌아설까 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을 마주하지 않으려 도망 다녔다.  


5. 

사실 나는 네가 나에게 절절맸으면 좋겠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내가 네 전부라고, 나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했으면 좋겠다. 네 일상이 나로만 채워졌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아무 일도 못했으면 좋겠다. 네 일상이 나 때문에 흔들리고 무너졌으면 좋겠다. 나 없이는 네 세상이 불완전했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걸 안다. 그럴 리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도. 아마 네가 진짜로 그런다면 나는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안 그러면서 너는 그랬으면 좋겠다. 되게 이기적이지만 뭐 어떡해. 나는 이제 성숙한 거 그만하고 싶거든. 어처구니없는 요구도 해보고 싶거든. 이 나이에.


6. 

그 책은 애인에게서 빌렸다. 그 사람의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반가우면서도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왜 샀냐 물으니 그는 사랑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7.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연애 초반에는 내 말이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내 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될 때가 있어. 내 옆에 누워 자신의 불안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좋았다. 솔직히 조금 기뻤다. 너의 불안을 알게 되어서, 너도 나처럼 어딘가 고장 난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8.

우리의 불안은 언제 사라질까. 아니 사라질 수 있을까. 너와 내가 존재하는 한 내 불안이 사라질 리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나는 불안이 내 영혼을 잠식하지 않는 선에서 '반려 불안'을 데리고 있겠지. 그 아이가 내 사랑보다 커지지 않도록 늘 예의 주시하면서, 늘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도록 잘 관리하면서. 불안이 팽창하려 할 때에는 사랑의 순간을 떠올린다. 나는 너와 내가 알고보니 같은 브랜드의 콘돔을 각자 산 것이 좋았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 좋았다. 네가 나를 (들쳐) 업을 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좋다. 나란히 누워 90년대 노래 메들리를 따라 부르는 순간, 눈을 질끈 감은 채 기타 핸드싱크를 하는 네가 좋다. 아무 음악에 맞춰 말도 안 되는 춤을 추는 우리가 좋다. 언제든 불안이 찾아오면 춤을 춰야지.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라는 검정치마의 노래 가사처럼, 춤을 추며 불안이랑 화해할 거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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