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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Sep 15. 2016

우리는 그래서 독일이 부럽다

DDR, 찰리 체크포인트, 베를린장벽기념관 

박물관이지만 전혀 박물관스럽지 않은 요상한 이름. DDR 박물관. 독일 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동독) 박물관이라는 뜻으로 통일 전 동독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동독 = 사회주의 국가


이런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멀쩡한 동독 일반 가정의 모습이 꽤 어색하다. 북한이 워낙 못 살고 있기에 왠지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동독은 굶는 사람도 없고 멋쟁이도 있던 곳이었다. 물론 식량 배급표를 보는 순간 다시 북한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국가가 반으로 나뉘어져 있어도 서독에 있는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던 그때 그 사람들. 베를린 장벽 너머로 손을 마주잡는 사람들과 아이들만이라도 벽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려는 어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하다.


지금은 정말 추억의 물건이 된 카세트테이프, 동독 사람들이 먹던 음식, 통조림, 사용하던 자동차, 텔레비전. 박물관 내부를 계속 보니 동독이란 느낌보다는 그냥 1960,70년대 독일 사람들의 삶 같다.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외국 물건이 꽤 눈에 많이 보이고, 외부와도 교류하고 있던 동독. 그래서일까. 동독은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60년이 넘는 분단의 세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북한. 너무나 다른 북한과 남한의 일상. 그래서 우리는 더 통일하기 힘든 걸지도..

동서 베를린으로 나뉘어져 있던 시절, 신호등 디자인마저도 달랐다. 위 두 사진은 베를린에서도 동독이었던 지역의 신호등, 아래는 서독이었던 지역의 신호등. 다른 곳의 디자인은 어떨지 몰라도 신호등에서만큼은 동독의 디자인이 훨씬 감각적인 듯하다. :)


두시간 여를 관람하고 나온 DDR. 이미 해는 졌지만 체크포인트 찰리로 갔다. 베를린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어져 있던 시절, 검문소의 역할을 했던 곳. 연합군, 외교관, 외국인 관광객 등만 이곳을 통해 드나들 수 있었다. 한 때 소련과 미국의 탱크가 있던 곳, 이탈자를 막기 위해 삼엄한 경비가 있던 곳은 이제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로 넘친다. 당시의 미국 측 검문소가 이제는 '재현'되어 있는 평화로운 곳.(미국 측 검문소만 남아 있는 것도 결국 서독이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을 흡수통일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면 나의 억측일까?) 

판문점은 꽤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관광지(라는 표현이 싫지만)이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은 오직 판문점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편하게 갈 수 있다는 판문점. 통일이 되어 판문점도 체크포인트 찰리처럼 허가 없이도 갈 수 있는, 카메라를 든 여행객들로 넘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다음날 아침, 베를린을 떠나기 전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 베를린 장벽 기념관 (Berlin wall Memorial) 으로 향했다. 멀리 시멘트 벽이 보인다.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 가까워 가는 신호. 다른 곳의 장벽은 다 철거했지만, 이곳을 포함한 몇 지역의 장벽은 남겨두었다. 그때를 절대 잊지 말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이겠지. 독일이 동서로 나누어졌을 때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담담이 말해주는 기념관. 기념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곳은 동서독의 통일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서 생중계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화면 앞이었다. 라디오를 듣자마자 기뻐서 미쳐버린 사람들은 모두 장벽 근처로 달려갔다. 도끼로, 망치로 벽을 찍어내고, 드릴로 뚫고, 그게 너무 느렸던지 대충 무너진 벽 너머로 그냥 점프해 달려가는 사람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벽 하나를 넘으려고, 지난 30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21세기,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마음이 아프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메세지 속에 반갑게 한국어를 발견했다.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온 우리는, 그래서 베를린을 좀더 특별하게 볼 수밖에 없다. 통일이 된지 25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옛 동독이었던 지역은 서독이었던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고 한다. 30년간의 분단, 통일 전 이미 많은 것을 대비하고 있던 그들이지만, 통일 이후에 만난 예상치 못했던 문제로 휘청거렸다. 엄청난 혼란을 수습해 나가는 와중에도 다시 선진국이 된 독일. 그들이 먼저 이루어낸 것. 고통스럽지만 해낸 그 일을 우리는 부러움과 경외심을 갖고 바라볼 수 밖에. 판문점이 누구나 갈 수 있는 관광지가 되고, 통일기념관이 세워지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베를린 장벽 위에서 환호하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기념관의 옥상으로 올라가면 일부러 남겨둔 베를린 장벽과 철조망 일부가 있다. 1분 안에 저 벽 너머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근처 아파트에는 1961년의 베를린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 부러움을 가득 안고 기념관을 나왔다.


PS. 한 달 반 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영국 여행객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통일 전 독일을 여행하며 체크포인트 찰리를 통해 동,서 베를린을 왔다간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제는 그저 역사적 장소, 관광지인 곳을 정말로 검문소로 이용해서 건넌 사람이 있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저녁에 숙소에 돌아가는 길에 운좋게 만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베를린장벽 붕괴를 기념해 남아있는 장벽에 세계 유명 예술가들이 그린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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