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벤(Schwaben) 포도 농장, 영묘 예배당
예나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다음 목적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버스로 6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찾다가 눈에 띈 '슈투트가르트'. 아무 이유 없이 단순히 이동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버스표를 예매했다. 다음 목적지에서 무얼 할지 계획하는 것보다 선배들과 다음날이면 헤어지는 아쉬움을 음주와 수다로 달래느라 바빴다. 결국 새벽 6시에 잠들었고, 아침 11시쯤 눈을 떴다.
고작 3일을 타인과 함께 지냈을 뿐인데, 그새 적응했는지 혼자 이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어색하다. 결정장애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아무튼 다시 도착한 슈투트가르트. 높은 빌딩들이 넘쳐나고, 지하철도 있는, 다시 대도시로 왔다.
슈투트가르트는 독일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일조량 덕에 도시 내에 포도 농장과 와이너리가 있는 특별한 곳이다. 예나에서 트래킹 했던 Windknollen이 자꾸 생각나 조금 자연과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슈투트가르트에서 처음으로 찾은 곳도 포도농장이었다.
숙소 근처 중앙역에서 S-Bahn(독일의 메트로)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나타나는 작은 마을. 내리자마자 마을 뒤로 적당한 높이의 산이 펼쳐져 있다. 마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버스를 탈까 하는 생각을 이내 접었다. 좁은 골목길을 걷는 재미도 쏠쏠해 경사진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작은 가게 앞에서 서성이다 포도밭 언저리에 도착했다. 마침 나무를 다듬고 계시던 할아버지에게 더 큰 포도농장을 제대로 보려면 어디로 가야 되냐고 물었더니 영어 못한다고 손을 내 저으신다.
"그레이프. 매니매니~"
양손을 크게 펼치고 포도를 가리키자 할아버지는 독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으며 열심히 길을 알려 주신다. 할아버지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아는 독어인"당케 쉔"(감사합니다)를 외치고 할아버지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걸었다. 목적도 없이 걷는 길이 되어버렸지만, 주변에 온통 포도나무만 있으니 상관없다. 주변에 와인박물관과 와이너리도 있다고 했지만 느낌상 이미 그곳에선 멀어진 것 같다.
포도알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날씨는 정말 좋았다. 운 좋게도 예나서부터 날씨가 좋았는데, 마지막 슈투트가르트에서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높지 않은 산 전체가 모두 포도농장인 곳. 농장 군데군데 작은 집들이 있는데 농장 가운데 아예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산을 거의 다 올라도 여전히 도시는 가깝게 있어 포도가 그리 깨끗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도시 안에 산과 포도농장이 있다니,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행운이다.
계속 농장을 걷다 보니 꼭대기에 예쁜 건물이 보인다. 조금 가까이 가보니 보이는 십자가, 샤펠(예배당)이었다. 건물이 너무 예뻐 무작정 샤펠을 향해 걷다 보니 근 3시간을 꼬박 걸었다. 샤펠은 5시 폐관이었는데 4시 50분에 도착한 나는 입장이 불가했고, 입구에서 내부 모습을 사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은 영묘 예배당(Sepulchral Chapel). 일찍 죽은 왕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왕이 왕비를 위해 만든 샤펠이란다. 세계 어디에나 로맨틱하고 돈 많이 드는 역사는 존재한다. 아무튼 그런 로맨틱한 사연이 있는 곳이라 그럴까. 때마침 결혼식을 하러 온 커플이 있다. 결혼식은 이미 올렸는지 부부와 하객들은 카메라 앞에서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산 정상, 슈투트가르트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 아름다운 샤펠.
결혼식을 올리기에 참 완벽한 장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부 모두 어찌나 예쁘고 잘생겼던지... 석양에 비친 커플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다. 초가을, 날씨가 좋은 슈투트가르트에서는 공원이나 교회에서 결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도시 곳곳에 있는 고성과 옛 성당, 아무렇게나 찍어도 그림이 되는 공간.
올라갈 때는 보고 싶은 걸 보겠다는 마음만 있어 여유롭게 주위를 살피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보니 와인을 주제로 한 상점이 참 많다. 작은 와이너리도 있고, 와인을 파는 곳들도 아주 많다. 그러다 보니 역시 술집도 곳곳에 많이 보였다. 슈퍼마켓에 들러 작은 병에 든 와인을 나발 불며 상점 구경을 하는 쏠쏠한 재미.
그 덕에 길을 잃어 해가 지고 한참 후에야 메트로 역을 찾았다. 하지만 길을 잃었던 만큼 슈투트가르트의 매력을 다시 발견한 시간이었다. 예나에서 봤던 작은 거리가 이곳에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