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인 미루기를 보여주마.『미루기의 기술』, 존 페리 저
"누구든 그 순간 원래 하기로 되어 있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 로버트 벤츨리
심각하게 미루는 버릇이 있다고 하는 스탠퍼드 대학의 철학 교수 존 페리의 책,『미루기의 기술』. 이 책의 영어 제목은 세상에나 "The art of procrastination"이다. 아름답다!
'그렇게 미루는 사람이 어떻게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까지 될 수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미루기의 정도와 내가 생각하는 미루기의 정도가 다른 게 아닐까'
란 의문이 들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이 책은 꽤 재미있고 또 얇다.(미루기에 대한 책답게 110쪽 밖에 안 된다. ^^)
글과 함께 시작한 로버트 벤츨리의 문장에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왜 난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하기 싫을까? '하지 마!'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누군가 시킨 일이라면 하기 싫은 그 감정일까...? 그렇다면 스스로 마음먹은 일을 지키는 것보다 '작심삼일'이란 신념을 더 열심히 지키는 내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래 하기로 한 일은 왜 하기 싫을까? "해야 돼, 해야 돼." 란 말속의 강제적인 느낌이 모든 사람들의 거부 본능을 강하게 일깨우는 걸까? 왜 시험기간만 되면 청소가 하고 싶고, 특정 정보를 찾으려고 인터넷에 접속한 나는 30분 후 탤런트 누구 씨의 결혼 소식에 달린 댓글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걸까?
체계적인 미루기
존 페리는 '미루기'란 강력한 신공을 아예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이용해서 잘 살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름하여 "체계적인 미루기". 죽을 때까지 미루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 최대한 그것을 다독여서 살아보자.
"모든 미루기 쟁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룬다. 체계적인 미루기는 이 부정적인 특성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는 기술이다. 미루기가 곧 무위도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미루기 쟁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정원을 가꾼다든지, 연필을 깎는다든지, 짬이 나면 파일을 재정리할 방법을 도표로 그려보는 등 조금은 의미 있는 일들을 한다. 미루기 쟁이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 그것이 더 중요한 일들을 하지 않을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더 중요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방편이 된다면 미루기 쟁이는 어렵고 중요한 과제들을 때맞춰 수행할 의욕을 느끼게 된다. 체계적인 미루기란 이 같은 사실을 역이용해해야 할 일들의 체계를 잡아 주는 걸 의미한다." - 『미루기의 기술』중
30분 전까지만 해도 난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5분 전에 확인한 내 이메일 함에 몇 주 전 번역 테스트를 했던 잊고 있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싶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스카이프로 우선 면접 볼 수 있겠냐는 그 이메일을 보는 순간, 난 『미루기의 기술』에 대한 내용을 빨리 쓰고 싶다는 욕구가 불끈 솟았다. 자고로 이메일 같은 건 확인하는 순간 바로 답변을 보내는 게 나의 에너지와 시간 분배를 위해서도, 상대방을 위해서도 좋지만, 난 지금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아무튼 도무지 버릴 수 없는 미루는 버릇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거나 잘 데리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1. Done is better than Perfect. - 완벽주의를 버리자.
일이 생기거나,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내 머릿속은 이 일을 완벽하게 해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 환상과는 달리 일은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일이 진행되지 않은 이유 중 상당수는 나의 환상 속에서 자라나는 완벽주의 때문인 경우가 꽤 많다. 내 상상처럼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는 때를 기다리다가, 혹은 정보만 주야장천 수집하면서 정작 시작도 하지 않는... 그러다가 마침내 데드라인을 하루 혹은 몇 시간 남겨놓고서야 부랴부랴 일을 끝낸다. 존 페리의 표현에 따르면 "완벽에 대한 환상이 실패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되어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일을 끝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우리는 완벽할 수가 없다. 완벽에 대한 환상은 우리를 정체하게 만들고 일을 시작조차 못하게 만든다. 페이스북 사무실에 걸려있다는 "Done is better than perfect"(완벽한 것보다 일을 끝내는 게 낫다.)는 사실이다. 그게 힘들다면 완벽하지 못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하지만 대개 그 최악의 상황이란 것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 거나 의외로 나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일단 해 보자.
2. "작은 행동들로 큰 일을 성취하라.", 노자 <도덕경>
"과제의 규모가 크든 작든, 어쩌다 한 번 생기는 일이든 아니면 매일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이든, 더 작고 부담이 덜한 하위 과제로 나누도록 하자. 하나씩 차근차근. 초반에 쉬운 일들을 배치하면 퐁퐁 솟아나는 성취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미루기의 기술』중
사실 스케줄러에 그날그날의 할 일을 적는 사람들은 많다. 해야 할 일을 까먹지 않고 다 해내기 위해 스케줄러를 사용하는 게 보통의 경우지만 존 페리가 할 일 목록을 쓰는 목적은 좀 다르다. 그의 이유는 성취감을 느끼고 일에 탄력을 주기 위해서다.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미루는 그의 스케줄러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알람을 끈다.
스누즈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커피를 내린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기까지 그는 벌써 여섯 가지의 일을 해내고, 스케줄러에 기분 좋은 가로줄을 그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성취감을 원동력으로 그다음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반면에 그의 스케줄러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커피를 잔에 따른다.
소파에 앉지 말고 책상에 앉는다.(소파에 앉지 않는다니...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나무늘보 같은 자신과 싸웠는지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할 일 목록은 그 전날 잠자기 전 적어놓는 게 좋으며, 아침에 바로 볼 수 있게 침대 옆에 두라고 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두 번째 알람시계는 부엌에 두고 자는 것도 추천할 만한 방법.
3. 리듬을 타라.
음악을 활용해 미루기 습관을 떨쳐 버리는 다른 방법들도 있다. 가령 차고를 청소해야 한다고 치자. 그것은 어마어마한 과제이므로, 당신이 곧바로 일을 시작 할리 만무하다. 하지만 적절한 음악이 있다면 청소를 시작할 수는 있다. - 『미루기의 기술』중
이건 매우 간단하고 기분 좋은 방법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중에는 누구라도 일을 시작할 수는 있다. 저자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힘을 북돋어 주는 노래를 들어라는 조언을 한다. 확실히 다른 문화권과 세대라 그가 추천하는 노래 중 내가 아는 노래는 아무것도 없었고, 노래는 좋았지만 내게는 그다지 힘이 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로 골라보자. 지난 일주일 동안 아침에 일어나서 음악을 들었더니 일어나서 다시 소파로 가는 일 없이 뭔가를 시작하긴 했다. 내가 들은 음악으로는
I go - 럼블피쉬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 Kelly Clarkson
I am yours - Jason Mraz
힘내 - 소녀시대
It's my life - Bon Jovi
I pray for you - 신화
본 조비의 노래는 아침마다 내가 파이터가 되는 느낌까지 준다. ^^; 꼭 힘을 주는 가사의 내용이 아니라도 흥겨운 멜로디를 들어도 좋다는 저자의 조언. 요즘엔 아침에 노래 들을 생각으로 약간 설레는 마음까지 생긴다. 물론 저 노래들을 듣다가 다른 노래가 궁금해져 샛길로 빠지는 경우를 주의할 것.
4. 컴퓨터와 미루기 쟁이
다양한 일에 관심이 많은 것. 이건 일을 미루는 이유 자체 일까? 촉매제일까? 서두에 말한 "누구든 그 순간 원래 하기로 되어 있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문장처럼 다양한 일에 관심을 뺏기는 건 단지 일을 하지 않은 구실일까? 아무튼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뺏아가는 인터넷의 바다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존 페리가 소개한 방법은 참 재치 있다.
자연적인 사건이 나를 방해해서 최면 상태를 깨뜨려줄 게 확실할 때만 브라우저를 켜는 방법이다. 이미 배가 고픈 상태 거나, 머잖아 아내가 나를 급히 부를 거라는 확신이 들 때, 혹은 이미 방광이 꽉 찬 느낌이 들 때에만 로그인을 한다.
노트북을 사용하는 분이라면 이메일을 열기 전에 전원을 뽑아 두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배터리가 닳으면 최면 상태가 깨질 것이다. (배터리가 100% 충전되어 있다면 좀 위험한 방법....)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알람시계를 한 시간 뒤로 맞춰 두도록 하자. (한 시간은 너무 길다. 15~30분 정도?)
나는 유치한 온라인 게임에 빠져 1,2시간씩 할 때가 있었는데 알람시계를 이용하는 방법을 써서 많이 줄였다. 알람시계를 10~15분 후에 맞춰 놓고 게임을 한다. 휴대폰의 알람이 울리면 게임도 엉망이 되어서 기분이 살짝 상하긴 하지만 쓸데없는 게임을 끝내는 데는 꽤 좋은 처방이었다.
5. 적과의 협력.
이 방법은 나도 가끔씩 썼던 방법과 좀 비슷한 것 같다. 부지런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도록 조언하는 내용인데, 물론 사람뿐만 아니라 시간, 내가 지불한 돈의 액수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가능하다면 약속을 오전 중에 잡고, 데드라인도 내가 게으름을 피울 수 없도록 좀 타이트하게 잡는다든가 하는 것처럼. 학원과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운동과 배움을 미루지 않도록 하는 등의...
미루는 습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을 미루지 않는 사람들과 팀을 이루는 것이다. 미루는 습관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그쪽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의 정상적인 업무 습관은 우리 눈에 낯설고 위협적으로 비칠 수 있다.(ㅋㅋ) 그러나 일의 완수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사람들이 알람시계보다도 더 효과적이다. 미루는 습관이 없는 동료와의 협력은 마치 알람시계를 맞춰 두는 것처럼 본인의 의지력과 상관없이 결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물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단점은 있다. - 『미루기의 기술』중
학창시절 조별 활동 시간, 부지런하고 의욕이 충만한 아이들과 한 조가 됐을 때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아이가 닦달하는 바람에 굉장히 피곤했지만, 일을 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끝내는 경험(!)까지 해 보고 그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확실히 가장 강제력이 높은 방법이니만큼 하는 동안 그리 즐겁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원했던 것을 성취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꽤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일을 끝내고 나서 결과물을 보고 또다시 이 강제성을 이용해서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 저자가 소개하는 미루기의 부가혜택
1) 해야 할 일이 어떤 사정에 의해 취소되었을 때. 물론 나는 이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2) 어떤 일을 미루는 과정에서 더 나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그 일에 훌륭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미루는 것은 일을 무작정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A를 해야 하는데 하기 싫어서 B란 일을 하는 것이다. (쓸만한 사진을 골라야 하는데, 그게 하기 싫어서 모처럼 컴퓨터 바탕화면을 청소하는 등) 체계적인 미루기는 다시 말해 '생산적인 미루기'이다. 나는 지금 이메일을 보내기는 싫지만,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보는 대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만큼 쓰다보니 이메일에 답장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 이번 달 안에는 이걸 꼭 해야 한다."
이렇게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강박이 오히려 나의 추진력에 제동을 걸고, '난 아무것도 제대로 못한다'며 자신을 구박하게 만든다. 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수와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게는 하지 말자. 조금씩 내가 움직일 원동력과 즐거운 마음을 가지자. 내게 까탈스럽게 구는 나 자신을 조금만 풀어주자. 존 페리가 말한 것처럼 미루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줄이고 조금 더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