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위인전』을 읽고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을 알고 싶다.'는 나의 몇 가지 퇴사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관심이 가거나 괜찮아 보이는 일들과 사람들에게 직접 연락해 보기도 하면서 지낸 퇴사 후의 시간.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문득 일어나 거울을 보는데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해 놓고서 난 또다시 좋아 보이는 무엇, 잘나 보이는 사람을 좇고 있었다. 그리고 자주 가던 카페와 블로그의 발길을 끊었다. 아마 그때였지 싶다. 이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20대의 미혼 남자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좀 똘끼가 가득했던 선생님과 함께 했던 어느 국어 시간. 아직도 기억나는 선생님의 한 마디.
"세종대왕이 훌륭한 분이시지만, 그분이 궁궐로 기생을 불러들여 얼마나 놀았는지 아니? 매일 술과 고기를 먹고 안 움직이니까 욕창이 생기고, 그게 세종대왕 건강에 치명적이었지. 너무 세종대왕을 위대하게만 보지 말자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왜 나의 환상을 깨뜨리시나요?'
라며 당시 선생님께는 차마 하지 못한 말만 입속에 맴돌았던 적이 있다.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의도를... 우리는 너무도 쉽게 위대한 누군가를 설정하고, 그 사람은 언제나 훌륭한 선택만 하고, 사리사욕은 전혀 없을 이미지를 씌운다.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갓 God'이란 말을 붙이고, '~느님'을 붙이는 것이 바로 그 예가 아닐까? 그 좋은 이미지는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겠지만, 그 사실은 또 다른 사실 역시 가려 버린다. 그리고 대개 그 또 다른 사실이란 우리가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 책 속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인물은 김수영 시인이다. 그의 이름과 시가 교과서에 실리고 (그가 의도한 건 아니겠으나) '위대한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 시인은 가정폭력을 행사한 나쁜 남편이다. 전쟁통에 자신이 죽은 줄 알고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부인에게 상처받은 김수영. 그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은 가지만, 그가 저지른 폭력은 분명 나쁜 일이다.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죄와 벌』이라는 시로 자신의 범죄를 낱낱이 까발렸다. 굳이 알릴 필요 없는, 물어본 사람 없던 폭력 행위를 그는 자신의 시 속에 담담히 표현했다. 그 덕에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시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가 저지른 일을 알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알려질 것이다.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시(예술)를 통해 그는 자신의 격을 스스로 낮추었다.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김수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 때문에 항상 슬프고 분노에 차 있지는 않았을까. 그 이상에 비해 항상 초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그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낱낱이 까발려 냈다. 바로 여기서 시인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그 어느 때라도 자신의 밑바닥을 알고, 자신의 못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 찌질하지 않다. 누구나 남에게 말하지 못할 자신의 가장 어두운 면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사람을 보며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마도 그래서 김수영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이 될 수 있던 게 아닐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자신의 못남을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까발렸으니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스티브 잡스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괴짜 천재들의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는 대작가이다. 정말 저런 친구가 있다면 의절해 버릴 정도로 정 떨어지는 사람. 책에서도 헤밍웨이의 말년에 친구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들만 남아있어 정말 도움이 될 조언이나 충고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적혀 있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준 헤밍웨이. 표면으로 드러난 그의 행동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고 있자니 요즘 흔히 하는 말인 '악마의 재능'이란 말이 떠오른다. 버림받는 것과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 권총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어린아이를 숨기고 있던 대작가. 그렇게나 훌륭한 작품을 쓰는 사람이 이렇게도 불안정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쯤에서 헤밍웨이를 보고 아이러니하다고 느끼는 나 자신조차도 '위인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단 것을 인정해야겠다.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명작을 탄생시켰기에, 이런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이의 위대한 업적을 토대로 그의 인격까지 완벽할 거라고 오해하는 일은 흔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우상화하고, 그에게서 조그마한 실망 거리 하나라도 발견하면 벼랑 끝으로 밀어버릴까? 권위적인 사회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훈련받은 탓이 아닐까? 사회초년생 시절, 일 잘 하는 팀장님은 성격까지 좋을 거라고 착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직 내재화시키지 못한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갓'을 붙이며 영웅을 찾고 있다. 특히나 갈수록 불투명한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의문이 들수록 영웅을 찾는 마음은 강해진다. 이쯤 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이 아니라, 내가 가진 믿음을 씌울만한 적당한 대상은 아닌가 싶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내 인생을 구원해 줄 완벽한 영웅을 찾을게 아니라 나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교육받지 않은 우리는 그게 참 힘들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부모나 배우자조차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그 누구의 생각도 아닌 내 생각을 가지고 결정 내리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좋게 그 생각에 맞는 사람, 혹은 그 생각을 더 발전시킨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존경하고 배우되, 그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을 부러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를 우상화하지도 완벽을 기대하지도 말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매일 사소한 후회와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처럼 위인전 속 사람들도 매일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며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단점에 짓눌리기보다 오늘 해야 할 일에 충실했다. 나의 어찌할 수 없는 단점 때문에 아프고 사람들에게 매일 상처받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일은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의 한 구절을 책에서 인용하며 글을 끝내고 싶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