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유럽여행에서 독일의 '부헨발트 수용소'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들렀다. 날씨가 좋았던 날이었지만 묘하게 싸늘한 수용소의 분위기, 수용소에서 끝나는 기차선로와 지금은 불타 없어진 수감자들의 막사와 가스실에서 느꼈던 비참함, 나치가 원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한데 모아두었던 수감자들의 머리카락과 수용소에 올 때 입고 들고 왔던 소지품들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 수용소를 다녀온 기억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나의 유럽 여행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에 손꼽힌다.
그 여행 이야기를 브런치에 쓰고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발견했다. 많이 생각하고 글까지 썼으니 이 책이 내 눈에 띈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수용소에서는 바깥에서 인간으로 누리던 그 모든 의무가 거세된다. 배급되는 음식은 항상 적고, 노동시간은 어마어마해서 사람들은 항상 배고픔에 굶주렸다. 폭언과 폭행, 죽음은 일상이었다. 살아남는 게 기적이었던 그 일을 실제로 겪었던 빅터 프랭클 박사. 내 상상 속에서 벌어지던 일들과 빅터 프랭클 박사의 담담한 회고록 속에 벌어지는 일들 간의 간격은 상당했다. 살아남는 게 가장 큰 가치였기에 내가 살기 위해 친구와 나의 수감번호를 바꾸는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 따위는 이미 없었다. 감독관의 손가락 까딱거림 한 번에 유대인들은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고, 굶주림 속에서 12시간 넘는 중노동을 견뎌냈다. 하도 먹을 게 없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다른 수용소 이야기를 들었다는 부분에서는 아연실색했다. 2시간 전까지 나와 이야기하던 사람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내 앞을 지나갈 때, 차가운 동태 같은 눈의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먹고 있던 수프를 계속해서 먹었다는 부분을 읽고는 다음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박사의 어조는 너무나 건조하다. 들어온 사람들의 90%가 넘는 수가 가스실에서, 혹은 노동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상황, 하지만 더 미치는 건 그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그 지옥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박사는 바로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 지옥 같은 상황, 인간이 더 이상 인간 취급을 받지 않는 그 순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도 우리에게는 마지막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하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만큼은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죽는 순간 울분에 휩싸여 욕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다. 언제나 영양실조 상태인 수감자들이지만,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빵 한쪽을 나누고, 어떤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생명만 지킨다.(빅터 프랭클 박사의 표현에 따르면 '모두가 같은 것 같은 강제수용소에서조차 사람들은 돼지와 성자로 나뉜다.') 여러 사람에게 같은 일이 벌어져도, 그 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고 환경은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결국 그 사람을 완성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의지, 즉 그의 선택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수면부족,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내 인생이 결국 나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다니. 그리고 그 선택이 나란 인간을 결정한다니... 내 삶이 내가 선택한 나의 의지라는 것을 항상 기억할 수만 있다면, 가끔씩 나를 미치게 만드는 허무주의와 회의감에서 조금 편해질 수 있을까?
수용소라는 지옥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박사는 살아남겠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생각했다. 당장 내일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 너머의 의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는 생사를 모르는 아내를 생각하고 자신이 쓰고 있었던 정신분석학 책을 생각했다. 그 책을 완성하는 것이 수용소 안의 그에게는 삶의 의미가 되었다. 쓰고 있던 원고는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뺏겨서 찾을 수 없지만, 그는 수용소에 있으면서 종이와 휴지가 보일 때마다 쓰고 있던 글의 키워드를 적어나갔고, 생각했다.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써나 갔다. 그 생지옥에서 박사는 삶의 희망에 기대기보다 삶의 의미에 기대었다. 실제로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이 되면 혹은 가을이 되면)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라며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 희망이 깨지는 순간 많은 수가 죽음을 맞이했다. 꺼져버린 희망이 살고자 하는 의지도 함께 꺼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주위 환경에 쉽게 일희일비하는 희망보다는 내 중심을 지키는 삶의 의미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 외의 것은 시도해 볼 시간도 힘도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던 나는 얼마나 못났는가? 먹고사니즘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만 보고 살기에는 인생은 뭔가 부족하다. 나는 내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서 그 어떤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의 의미는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내 마음대로, 나의 자유의지로 만들어낼 수가 있다.
그래, 그렇다면 도대체 내 인생의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된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책에서처럼 '너 자신이 스스로 찾아봐. 너 자신을 잘 들여다봐.'라는 두루뭉술한 답변 대신 프랭클 박사는 꽤 구체적인 답변을 준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하면서. (물론 무엇을 창조하고 어떤 일을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있다.)
어떤 일(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자연, 문화 등)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면서.(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쉽게 되는 일은 아니겠으나, 찾아가는 과정에서 보고 만나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 내 인생의 의미를 모르지만, 의미란 것을 생각하면서 경험하고 생각하는 과정은 의미를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지난날보다 확실히 행복하다. 그러니 의미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허무주의에 빠지지는 말아야겠다. 게다가 프랭클 박사가 따르면 삶의 의미란 것도 시기에 따라서 충분히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죽음의 경험을 하고 살아 돌아온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아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삶. 그 아름다운 삶을 꿈꿔 본다. 책에서 자주 인용했던 괴테의 한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괴테
PS.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 정도의 뜻이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영어판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 수용소의 대빵 격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른 이야기
https://brunch.co.kr/@swimmingstar/139
* 독일 바이마르의 부헨발트 수용소에 들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