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라 Sep 21. 2016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나?

부헨발트 수용소, 바이마르, 독일

베를린에서 나치에 관련한 몇 가지 것들을 보고 와서 일까. 유럽 오기 전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수용소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일 밤 선배들과 수다와 음주를 즐기면서 근처의 '부헨발트 수용소'에 가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근데 독일에도 수용소가 있어요?"

나치와 전쟁 중이던 국가에만 지은 줄 알았던 수용소는 독일에도 3개 정도 있다고 했다. 예나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석사과정 중인 선배도 '부헨발트 수용소'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며 들뜬 모습이었다.

예나에서 기차로 25분 정도 가면 나오는 작은 도시 '바이마르'. 기차역에서 부헨발트 수용소에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30분가량 이동했다. 버스를 탄지 10분이 지났을까. 시내에서 멀어진 버스는 점점 산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건물도, 자동차도 없는 풍경이 계속되자, 버스 기사님이 승객을 납치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 너무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그럴 만도 하지. 수용소잖아. 최대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곳에 지어야 도망도 못 치고, 근처 주민들도 모르지."


마을과 한참 떨어져 있는 그 물리적 공간의 차이, 조금씩 내가 나치 수용소에 가고 있음이 실감 난다. 숲 속 풍경만 지속되다 드디어 자동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는 큰 주차장이 나왔다. 도착하자 눈 앞에 보이는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품 가게 및 안내소.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기념품 가게에 그날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보통 기념품 가게와는 다르게 차분한 분위기와 밝지 않은 색깔의 여러 기념품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과 DVD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치가 저지른 잔악한 짓, 유대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 기념품 가게라기보다는 작은 서점 같다. 그곳을 나와 수용소 방향으로 걷다 보면 유스호스텔이 나온다. 이런 곳에 왜 유스호스텔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유럽의 많은 중고등학생이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온다고 한다.

Jedem Das Seine라는 말로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능력이 있다'는 뜻. 능력에 따라 여기 왔으니 받아들이란건가..

자국이 저질렀던 끔찍한 짓을 반성이라도 하듯 입장료는 무료다. 


부헨발트 수용소 입구,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고 미군이 이곳에 도착했던 시간, 3시 15분. 시간은 그 이후로 멈춰 있다. 파시즘의 광기가 사라진 그 이후로 시간은 멈췄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 저 시계가 언제 돌아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를 반대했던 운동가, 성작자, 소련군 포로, 집시, 동성애자 등 그냥 나치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다 모아 두었다. 수용소 입구에는 수용소가 해방되어 미군이 들어온 순간의 사진과 수감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는 동안 마음이 아파 차마 사진으로 찍지는 못했지만, 전시관을 표시하는 입간판에 있는 사진만 보더라도 그 당시 수감자들의 영양과 주거(라고 할 수 있나?) 상태를 알 수 있다. 물건을 서랍에 집어넣듯, 사람을 '넣어뒀다.' 밥그릇으로 베개를 대신하고 담요도 제대로 없다. 하나같이 앙상하게 마른 사람들.

수감자들이 묵었던 건물인 Barrack은 모두 불타고 없다. 대신 이름돌만 남아 그때의 위치를 알려준다. 황량한 터만 남은 곳. 맑은 날씨지만 한기가 돈다. 정말 따뜻한 날이었지만,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캄보디아의 뚜엉 슬랭(고문박물관)에서 느꼈던 한기가 이곳에서도 느껴진다. 역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많은 땅에는 그런 기운이 있는 듯하다.

수용소 한 켠에는 나치가 수용소를 세웠던 도시들을 새겨놓은 공간이 있다. 이곳 부헨발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나 다른 수용소를 가기 전에 거쳐가는 역할을 했다고 하니, 수용소마다 성격도 분명히 달랐나 보다.  유럽 곳곳에 수용소를 세워놓고 조직적으로 운용한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교수형이 이뤄졌던 곳

이곳에서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가스실은 없지만, 생체실험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가스실 대신 교수형, 총살, 고문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에 질병, 영양실조, 가혹한 노동으로 죽은 사람이 제일 많단다. 시신은 화장장에서 화장했다고 하는데, 죽은 사람의 유해를 가족들에게 돈 받고 팔았단다. 특히 이곳 수용소장과 그의 아내는 잔인한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그 아내는 사람 가죽으로 전등갓, 책 커버, 장갑 등 무얼 만들어 꾸미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했다고 한다. 나치가 아닌 모든 사람은 그들과 아예 다른 종류의 생명체란 말인가? 도저히 인간에게 하는 짓이라고 볼 수가 없다.

 

"너네 역사나 반성하지."

자국이 한 짓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와서 추모를 표하는 사람들. 그래도 당시 유럽인들의 고통에 공감해서 최소한 이런 추모의 끈을 묶어둔 사람이라면 자국의 역사도 바로 알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일 거라 믿고 싶다. 

수용소 해방 후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된 독일 바이마르 주민이 희생자 사체더미를 보고 눈을 가린다

1945년 미군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해서 부헨발트 수용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릴 때, 바이마르 주민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끔찍한 시설이 집 근처에 있는 줄 상상도 못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치밀하게 독일 국민들의 눈을 가린 나치 정권. 비단 국민들의 눈을 가리는 일이 그때만 일어났을까? 지금도 충분히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들이 빈번한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법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필요한 듯하다.


* 수용소의 대빵 격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른 이야기

https://brunch.co.kr/@swimmingstar/139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책 이야기

https://brunch.co.kr/@swimmingstar/151





매거진의 이전글 [이탈리아] 비로소 피렌체 나들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