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이렇게나 소박한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 Museum
화창한 터키에서의 셋째 날, 블루모스크 근처의 바다 쪽에 위치하고 있는 톱카프 궁전 탐방에 나섰다. 15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했다고 하는 이슬람의 궁전. 오스만 제국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세상의 중심이었을 이 곳. 벽 곳곳에 쓰인 아랍어는 여전히 글자로 보이지 않는다. 처음 아랍어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먹었던가.
그렇지만 오히려 난 외국인 친구들에게서 한국어를 맨 처음 봤을 때 외계어 같이 보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정말? 나는 아랍어가 그런 느낌인데 한국어가 아랍어보다 더 외계어 같아?"
"응. 아랍어보다 더."
그 말을 듣고 받은 충격도 충격이지만 외계어에 대해 자동반사적으로 아랍어가 떠올랐다는 것도 이제 보니 좀 웃기다. 아무튼 그 일 이후로 난 독창적으로 생긴 나의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는데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그러려나? 사실 아직도 아랍어를 보면 이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런 게 글자가 될 수 있지?'
아무튼 벽과 방 입구마다 쓰여 있는 아랍어 덕에 톱카프 궁전에 있는 게 마치 외계에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던 성은 거대한 샹들리에와 한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초상화, 원목 책상과 의자가 있는 유럽의 이미지가 강하다. 근데 이곳은 타일로 벽을 치장하였고(궁전만 아니라고 하면 화려한 목욕탕에 온 기분) 책상과 의자 대신 긴 소파와 카펫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미디어로 접해 왔던 궁전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그래서 더욱 독특하다
그 누구의 초상화 한 점 없고, 타일로만 벽을 치장해 둔, 매우 소박한 궁전. 한 공간이 끝날 때마다 이어지는 궁전의 정원이랄 수 있는 안뜰에는 작은 분수가 있고, 모든 방의 입구에도 수도꼭지가 있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 성수를 뿌리는 것처럼 그런 의식이 있나 싶었는데 술탄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위한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이렇게 이용될 수 있다니 아이디어 한 번 정말 기발하다. 궁전에서는 시원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이스탄불의 신시가지 지역과 갈라타 타워가 함께 보인다.
톱카프 궁전의 또 하나의 거대한 구역. 하렘. 아랍어로 "금지된"이란 뜻의 하렘은 톱카프 궁전에서 술탄의 여자들과 술탄의 가족, 내시들이 지내던 곳이라고 하는데 400개가 넘는 방이 있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을까? 이곳의 실세는 술탄의 어머니였는데, 그가 술탄에게 여자들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렇게 소개받은 여자들만 술탄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술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중국의 측천무후가 떠오르고, '여성들의 권력 암투'로 인기 있던 예전 드라마 '여인천하'가 생각난다. 술탄 어머니의 눈에 띄려고 얼마나 많은 뒷거래와 음모가 오고 갔을까. 영화나 드라마가 되면 분명 꽤 재미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궁전에서 살지 몰라도 일생동안 한 번도 술탄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곳에 갖혀 쓸쓸하게 보냈을 대부분의 여자들. 하렘의 작은 정원에서 보이던 바다는 그들이 답답한 마음을 풀던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톱카프 궁전의 맞은편, 지극히 유럽스러운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페리를 타고 바다에서 이스탄불을 바라다보면 이렇게 멋진 건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내 사진은 멋지지 않다..) 바로 돌마바흐체 궁전. 한눈에 봐도 톱카프 궁전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궁전의 느낌을 주는 곳.
궁전의 앞은 유럽에서 많이 봤던 시계탑이 우뚝 서 있다. 아니나 다를까 궁전의 모양도 며칠 전 봤던 톱카피 궁전이나 하다못해 이스탄불에 널려 있는 모스크와 확연히 다르다. 알고 보니 이곳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지은 궁전이란다. 바다를 매립하고 갖가지 화려한 물건들을 유럽에서 들여오다 보니 나라의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오스만 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었다는...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이 생각난다. 권력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결국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나라를 망하게 요인이 되어 버린... 역시나 감당할 수 없는 사치(?)는 독과 같다. 한편으론 무리하게 지어 한 나라를 휘청이게 만들었지만 후손들에겐 좋은 볼거리와 또 하나의 수입원을 제공하니 이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긴 하다.
궁전 내부에서는 200개가 넘는 방과 36개의 샹들리에, 크리스털 촛대 등등 화려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보물이 워낙 많아서인지 궁전 내부를 보려면 궁전에서 직접 운영하는가이드 투어와 함께 해야 하고, 슬리퍼도 따로 신어야 한다. 아쉽게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찍지 못했는데, 직원들이 투어를 따라다니며 어찌나 엄격하게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던지 찍다가 걸린 사람의 사진기 속 사진을 직접 지우기도 했다. 들어가기 전에는 참 까탈스럽게 군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궁전 안을 들여다보니 그 화려함에 그들의 까탈스러움이 이해되기도 했다. 유럽의 궁전에서 봤던 것처럼 각 방과 홀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고, 각 계단마저도 번쩍거리는 샹들리에와 화려한 카펫으로 치장되어 있다. 메인 홀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볼 때처럼 고개를 확 젖히고 보아야 하는,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천장화가 궁전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이곳에도 여성들이 거주했던 하렘이 있었지만 그곳은 패스하고 궁전의 작은 뜰을 거닐었다. 다른 곳은 개방하지 않아서 인지 내부 수리 중이어서 그런 건지 볼 것이 적어 궁전이 작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돌아다니기 좋은 가을 날씨답게 뜰을 걷는 게 좋았고, 바다로 향해 있는 궁전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니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야 소피아 성당처럼 이곳도 보수공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어서 못 들어가 보는 곳이 의외로 많아서 그저 정원을 열심히 걷기만 했다.
땅의 주인은 지난 몇 천 년간 여러번 바뀌었고, 사람들도 바뀌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을 새로 짓기도 했고, 아예 떠나기도 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기도 하고, 복구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지나 한 도시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스타일의 궁전이 존재하게 되었다. 유럽의 영향, 아시아의 영향을 다 받으면서도 고유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스탄불. 정말 매력적이다. 게다가 생동감 넘치는 이 곳. 기회가 되면 한 달 정도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