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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Jun 27. 2017

[불가리아] 여행이 길어질수록 계속 비워낸다

플로브디브 도보여행

2019년에는 플로브디브에서 유럽 문화 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란다. 아직 몇 년이 남았지만 홍보는 이미 시작되었다. "유럽 문화의 수도는 플로브디브"라는 깜찍한 허세가 도시 곳곳에 나부낀다.


플로브디브의 다운타운은 올드타운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다운타운의 중심 대로는 보도블록마저도 다르다. 중심으로 쇼핑몰과 화려한 상점이 죽 늘어서 있고, 노천카페가 즐비하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엣 건물에 최대한 녹아들어 있어 플로브디브의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다. 이 중앙 대로만 보고 있으면 공산국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노천카페를 보고 있자니 여기가 유럽이긴 유럽이구나 싶다. 다만 대로의 시작 지점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카지노는 이 거리 가득한 유럽의 이미지와 이질감을 자아낸다. 벨기에에서도 카지노가 도시 한가운데 서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여전히 낯선 광경이다. 한국의 대도시에도 카지노는 있지만 호텔 안에 숨어있다. 그런데 이곳의 카지노는 제발 날 좀 봐달라고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으니, 왠지 도시가 저렴해보인다.

대로의 중앙 2019 PLOVDIV 문구 옆에는"Statue of Milyo the crazy"라는 동상이 있다.(아니 동상 옆에 '2019 PLOVDIV'가 맞는 말이겠다.) 밀요는 정신적으로는 좀 불안했으나, 사람들에게 웃음을 줬던 사람이라고 한다. 실존인물인지 가상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귀가 잘 안 들렸던 밀 요의 동상에 귓속말로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밀요에게 내 소원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고 싶은 소원이 없었다. 소원이 없다니... 꽤 당황스러웠다. 내가 소원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사실 여행하기 전에는 여행을 하면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도 얻으며 머리와 가슴 속에 무언가를 한 가득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긴 여행과 채움은 관련사항이 아닌지 나그네 길이 길어질수록 머리와 가슴은 가벼워졌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남의 땅에서 비비적댈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 외에 바라는 것도 없다.

다운타운과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또다른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다운타운의 끝에는 거대한 로마 원형 경기장(Roman Stadium)의 잔해가 남아있다. 로마제국의 흔적을 터키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불가리아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발굴되어 대중에게 개방된 한쪽 관중석 부분만 해도 엄청난데 얼마나 큰 경기장이 있었단 얘기인가? 아주 옛날 잘 나가던 플로브디브의 지난날을 엿볼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수도 소피아보다 플로브디브가 더 불가리아만의 문화와 역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빈말이 아니었나 보다. 밤이 되면 경기장의 전구에 불이 들어와 더 신비로운 풍경을 뿜어낸다. 그 안에는 레스토랑도 있고, 경기장 내부를 관람할 수도 있지만, 터키의 에베소에서 로마 유적을 보고 온 터라 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불가리아는 선거유세의 열기로 뜨거웠다.>


또다른 끝자락에 위치한 로마 경기장에서 왼쪽에는 올드타운의 그리 높지 않은 언덕길이 왼쪽에는 펍과 바가 늘어선 유흥의 거리가 나온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늘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만국기이다. 아니, 모두가 다 술 브랜드인 것 같으니 만술기라는 말이 맞을까?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술값도 비싸지 않다고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귀띔해 준 곳이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한 잔 하기로 마음먹고 계속 걸었다. 젊음의 거리라고 해도 불가리아의 전통건물은 그대로 남아있다. 건물에 적힌 숫자를 보니 100살이 다 되어가는 건물들이 빽빽하다. 거리는 전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플로브디브 사람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감각을 다 새겨 놓는다. 이곳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그래피티와 어느 벽 하나라도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작은 올드타운과 젊음의 거리가 이렇게나 조화를 이루고 한 공간에 살고 있다니... 옛것을 최대한 지키면서 현재의 개성과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에선 확실히 불가리아 사람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남아 있는 로마유적의 흔적


The Tsar Simeon's Garden and the Singing Fountains 밤이 되면 음악과 함께 아름다운 레이저쇼를 하던 다운타운 근처의 인공호수

이곳을 지나 눈에 띄는 저렴한 입장료에 끌려 플로브디브의 고고학 박물관에 들러 시간을 때우다 폐관 시간에 맞춰 밖을 나왔다. 이미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짧아진 낮의 해로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이 실감 난다. 어스름이 짙게 깔렸지만 벌써 숙소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숙소에서 더 멀리 걸어가야겠다. 플로브디브 사람들이 사는 진짜 마을을 보고 싶다. 5분쯤 걸었을까? 이슬람 사원이 눈에 보인다. 한때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곳이니 이슬람 사원이 있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불가리아 정교회'라고 불리는 불가리아의 독자적인 기독교 신도가 인구의 85%를 넘는 이 곳에서 당당하게 다른 종교를 선택하여 믿고 있는 사람들. 남들과 다른 것에 너무나 큰 부담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부끄러워졌다. 불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수십 명의 신도들이 앉아 기도하고 있다.


기웃거리다가 더 북쪽으로 걸어가 본다. youth hill에서 본 마리차 강(Maritza river)에 가까워지고 있다. 피렌체에서 봤던 베키오 다리 위의 상점처럼, 이곳 다리 양옆에도 상점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베키오 다리처럼 철저히 관광객을 겨냥한 상점이 아닌 정말 여기 사는 사람들이 다녀가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곳의 저렴한 물가에 감탄하며 뭐 살 만한 게 없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내 모습.. 짠순이는 여기서 너무 행복하다. 그러다 결국 보세 가게를 발견하고 만 원 정도 하는 값으로 겨울 대비용 오리털(이라 믿고 싶은) 잠바와 셔츠 2벌, 총 3벌의 옷을 샀다. 그리고 여행 중에 구멍이 나고 밑창이 완전 벗겨저버린 운동화를 버리고 새 운동화를 사고, 똑 떨어진 로션도 샀다. 가게 주인과 나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강한 협력의 의지로 서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플로브디브의 아파트

불가리아는 지금까지 봐왔던 유럽 국가와는 다르다. 겉모습도 다르지만 특유의 그 차분한 분위기랄까. 그 차분하고 왠지 모를 차가운 분위기가 앞으로 이동할 동유럽 국가들에 만연해 있던 건 참 신기했다. 동구권이었던 나라가 으레 그렇듯 뒤늦게 시장경제체제에 진입하고 적응하느라 그들의 삶은 우리가 봤을 때 경제적으로는 좀 뒤처져 있다. 처음 플로브디브에 도착해서 이런 아파트를 봤을 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회색의 불가리아 주공아파트스같은 이 건물을 보면서 공산주의란 단어가 강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도 생각했다. 


다리 끝 좌판에서 파는 핫도그를 하나 사 먹으며 동네를 기웃거리는 지금이 문득 행복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내가 정말 로컬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왔는지, 동양인을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남을 현격하게 느낀다. 다운타운에서 꽤 멀리 걸어왔는데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한 가지가 눈에 띈다. '카지노'! 

도대체 이 동네에서 뭘 하겠다고 이런 곳에 카지노가 있는 건지... 시끄러운 소리 화려한 불빛으로 봐서 안에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7년 전 정선 카지노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여행자 특유의 여유가 넘치는 카지노 대신 정선에서는 뭔가 모를 절박함과 열기가 느껴졌다. 사람도 물론 많았다. 내가 휴가철에 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리 작은 기계 앞에도 사람들이 죽 늘어서 게임할 차례를 기다리는 장면은 꽤 충격적이었다. 게임에 빠져 전재산을 날리고, 등록금을 날리는 사람들이 이곳 호텔에서 종종 자살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정선 기차역 직원에게서 들었다. 카지노 안을 꽉꽉 매우고 있던 사람들에 질려 30분도 채 못 있고 나왔던 그때의 기억이 나자 그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는 길에 아까 봐 둔 술집에 들러 찝찝한 기분을 맥주 한 잔에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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