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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토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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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Sep 09. 2019

오랜만에 고시원

10년 전 나는 운 좋게도 인턴 두 군데에 합격을 했다.

하나는 부산.

하나는 서울.

월급도 나란히 세후 95만 원 전후.


수입보다 지출이 클까 봐 두려웠지만 집 떠나 살아보고 싶은 강력한 마음, 부산에서의 같잖은 압박면접에 상한 마음은 나를 서울로 이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던 사람에게 돈이 어디 있나. 엄마에게 오십만 원을 빌려온 내게는 고시원이 필수였다. 게다가 밥과 김치도 준단다. 대박!


 ‘그래도 창문이 있는 곳이 낫겠지? 사람이 빛은 보고 살아야지.’

지하철로 여덟 정거장이면 회사로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고시원이 많은 동네로 익히 유명한 그곳에서 고시원을 골랐다. 방 안에 화장실도 있는 고급(?) 고시원은 가장 먼저 패스! 가장 싼 곳을 찾아 창이 있는 을 골랐다.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내가 고른 곳은 정말 후지긴 후졌다. 부엌과 샤워실의 곰팡이 흔적, 맨발로 걸을 때마다 쩍쩍 소리를 내는 바닥과 가끔, 아니 자주 보이는 바퀴벌레 등. 큰 도로가에 있는 통에 잠들려고 누울 때면 귀마개가 필수였다.

 ‘얼마나 없이 살면 남의 숟가락을 가져가냐!’

어느 날 공용 부엌에 딱 10분간 두었던 내 수저가 사라졌다. 

 

ㅡㅡㅡㅡㅡㅡ

 ‘잠만 자는데 창문이 오히려 거슬리네.’

그리고 두 달 후, 창문이 없어서 똑같은 가격, 더 나은 시설을 가진 곳으로 옮겼다.(고시원에도 급이 있었다. 내 물건은 없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도로 가도 아니었고 화장실도 깨끗했다. 옥상에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어서 빨래도 뽀송뽀송하게 말릴 수 있었다. 마침내 나만의 아지트가 생겼다. 정말 행복했다. 없는 살림이지만 술 먹고 꽐라가 된 친구나 서울로 놀러 온 친구를 몰래 재우기도 했다.

 ‘어차피 몇 개월만 있을 건데. 여기서 정식으로 일 구하고 원룸을 구해서 나가자.’

나는 희망이 있으니까. 건강하고 젊으니까. 집을 떠나 내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곳은 내가 꿈꾸는 공간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뭔가 스스로 선택한 느낌,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혼자 나와 산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진짜 어른이 된 느낌이랄까. 다른 방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온 학생 혹은 직장인 같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왠지 모를 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몇 달 후, 원룸을 구해서 나간다는 꿈을 이루는 대신 나는 수술받은 몸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고시원에서의 7개월이 끝났다.


 “그동안 이런 데서 살았던 거야?”

 "왜? 방이 그렇게 작아?"

고시원 생활을 정리하는 날, 짐 옮기는 걸 도와주러 온 남자 친구가 내 방을 보고 울컥했다. 단 한 번도 방이 작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지라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알바가 아닌 처음으로 벌어보는 돈, 퇴근 후 학원 다니던 것에 대한 행복함,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뿌듯함, 정직원이 되고, 영어를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이 묻어있는 장소였다. 그곳은 내게 집 이상의 희망, 자유, 가능성을 의미하던 곳이었으니.


누군가들도 그때의 나처럼 고시원에서 희망을 보고 있겠지? 그때의 기억 덕분에 고시원과 관련된 콘텐츠를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껴왔다.

https://www.opengirok.or.kr/3888

하지만 10년 사이 고시원은 내가 알던 고시원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시원 화재는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고시원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양극화 문제였다. 의식주 중 ‘주’는 그 무엇보다도 양극화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예전의 고시원은 그래도 대학가나 학원가, 회사 주변이었는데 지금은 꼭 그것도 아닌 듯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내가 살던 때 내 옆방을 쓰던 사람들은 거의 내 또래였다. 하루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옆 방에 입주했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가 조선족이란 걸 알게 됐다. 자주 전화통화를 한다고 여겼던 그녀는 알고 보니 그녀의 딸을 데려와 같이 살고 있었다. 항상 눈치를 보며 조용히 이야기하던 그 모녀. 화장실에 갈 때는 두 명이 교대로 다녀오고 딸은 혹시나 들킬까 부엌에 가지도 않을 정도로 방에만 있었다. 가끔 모녀간의 말싸움에서 고시원 실장을 향한 눈치와 어떻게든 목소리를 낮춰서 화를 내려는 노력이 묻어 나올 때는 짜증이 나다가도 안쓰러웠다. 그게 10년 전이었다.


지금의 고시원은 그 모녀의 확장판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놀랍게도 5,60대 분들이 정말 많이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다. 영화 <기생충>의 가난한 두 가족이 놀고먹다가 그 지하에 도착한 것이 아니듯, 열심히 살았지만 이 사회에서 밀려나는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이 도착한 곳이 고시원이었다. 젊었기에 불편한 것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면 이젠 그 불편함을 뼛속까지 느껴야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 보증금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가족 중 그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되거나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도 건강하다면 다행이지만 장애가 있거나 아프면 상황은 힘들어진다. 고시원은 더 이상 돈 없는 젊은 사람이 잠시 사는 곳이 아닌 나이 많고 돈 없는 사람이 다른 곳을 선택할 수 없어 계속 머무는 곳이 되어 버렸다. 여전히 그때의 나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가 갖고 있던 낭만은 어느샌가 사치스러운 감정이 되어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ze4QsrY00w&t=556s


그러다가 한 달 전 우연히 고시원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또 보게 됐다. 파주의 어느 고시원에서는 원장님이 거주하는 분들에게 매주 두 끼를 제공한단다. 보통 고시원처럼 밥과 김치만 놓아두고 알아서 먹는 게 아니라 매끼 밥과 국, 다섯 가지 이상의 반찬을 제공한다. 그것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호텔도 이렇지는 않다. 밥과 국, 매일 바뀌는 다섯 가지 이상의 반찬은 파라다이스다! 서재도 있고, 작은 헬스장도 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일반 고시원과 같은 금액이다. 당연히 수익은 적자로 들어선 지 오래.


고시원 월세를 몇 달치 내지 못해 도망간 사람의 짐은 아직까지 놔두고 버리지 않고 놔두고 계신다. 병원비가 감당이 안 되어 포기하려는 사람에게는 병원비를 주시기도 한다.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수익을 내려고 고시원을 하시는 게 아니었다. 세상이 각박하다지만 아직 이런 천사들이 남아있는 걸 보면 모두가 죽어라는 법은 없는가 보다.


그래서 그곳에 쌀을 40kg 보냈다. 요즘 기부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하루에 쌀 20kg를 사용한다니 내가 보내는 게 정말 작은 양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곧 추석이 다가온다. 한 번 더 쌀을 보내야겠다. 


PS. 다들 편안한 추석 명절 보내세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3944224

https://brunch.co.kr/@swimmingstar/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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