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막연히 영어로 말할 때는 무조건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곳에서 온 사람과 이야기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영어는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에 어느 외국인을 만나든 영어를 쓸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동안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과 영어를 사용하는 비중이 훨씬 높다는 거다. 요즘 시대에 어딜 가든 외국인 혹은 이민자가 많으니 설사 영어가 국어인 나라에 살아도 마찬가지일 거다.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하면 당연히 한국어 억양이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사용한 사람이나 정말 언어를 좋아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비정상회담'에 나왔던 몇몇 분들)이 아니고서야 모국어의 억양은 정~~~~ 말 버리기 힘들다. 이것은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의 영어에는 중국어 억양이, 스페인 사람의 영어에는 스페인어 억양이 남아 있다. 또한 영어가 모국어라도 싱가포르처럼 특유의 억양이 있는 경우도 많다.
아 얘네 영어 정말 못 알아먹겠다..
싱가포르에 있었으니 나는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의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정말 많았다. 싱가포르를 제외한 동남아시아 나라들도 각각 자기 나라의 언어가 있었으니 그들과 영어를 할 때는 항상 그 나라 모국어의 억양이 남아있는 영어를 들었다. 싱가포르 생활 초반 싱글리쉬도 벅찬데, 이 다양한 나라 사람들의 영어를 알아먹는 것도 내 앞의 과제였다. 미드에만 익숙했던 나는 영국인의 영어도 힘들었다.
'아 참 듣기 싫다....'
나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나의 생각을 산산이 깨부순 일이 입사 후 얼마 안 되어 회사에서 발생했다. 그건 바로 회의시간에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인도인과,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Good idea!'라고 하던 영국인였다.미/영/호주식 영어처럼 들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내 입에서 나오는 콘텐츠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 영어가 별로라고 생각해 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다가 일에 의욕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실제로 나는 '일은 잘 하지만 일에 대한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 그게 아니었는데... 영어로 말하는 게 부끄러웠던 건데...ㅜㅜ
아무튼 사람들은 어차피 원어민도 아닌 내 발음과 억양에 관심이 없다. 내가 뭘 생각하고 어떻게 표현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발음이나 억양 가지고 훈수 두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보통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면서, 아직 영어가 일정 레벨에 도달하지 않은 외국인들(특히 한국인들이 많음. 발음만 잘 굴려주면 내용이 아무리 유치해도 잘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비정상회담'에 나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국어 억양 따위 가뿐히 무시하며 '말 잘한다'라고 하지 않던가. 유튜브에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영어 스피치로 영어실력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 다큐멘터리가 있다. 외국인은 모두 그가 영어를 잘한다고 하지만, 한국인만 그의 영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말 잘한다'의 기준은 원어민같은 매끈한 억양과 발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콘텐츠'다.
그 누구의 영어라도 쉽게 알아듣게 된 것은
싱가포르의 장점 중 하나는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오만 나라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라는 거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들은 물론 이란, 예멘, 이집트, 팔레스타인, UAE 등에서 온 사람들과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간접 체험 말고도 이 기회는 참 감사했다. 왜냐면 정말로 다양한 영어에 내가 노출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어를더 이상 평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을 만나서 내 영어실력이 향상된 것이 아니다. 나는 출퇴근 시간에 영어 듣기를 계속했고, 싱가포르에서도 거의 2년 동안 다양한 주제를 영어 뉴스로 공부하는 스터디를 했다. 영어를 쓸 수 있는 곳에는 다 다니려 했고, 필요한 정보는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찾으려 했다. 내가 아는 영단어의 수준을 더 높여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누구를 만나든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부담이 사라진 것은 내 영어실력 문제였지, 상대방의 특이한(?) 영어 문제가 아니었다.
'아 이 나라 사람 영어 너무 이상해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싱가포르와 호주에서 지내며 깨달은 게 있다면 위의 말은 내 영어실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거다. 언어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 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외국인이 아무리 한국어를 요상하게 구사하더라도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한국어를 잘하기 때문인 것처럼. 억양이니 뭐니 해도 결국 언어의 최종 목표는 '의사소통'이니까.
*억양이나 발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쓴 글이 절대 아닙니다. 각 언어의 기본적인 발음, 강세, 억양, 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언어의 목적과 기본을 잊지 말자고 써 본 글입니다.
PS.
싱가포르 생활 초반 한창 영어를 배우러 다니던 시절, 'Country'를 '카운치'로 발음해서 도대체 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먹게 만들던 베트남 친구가 있었다. 'Country'뿐 아니라 여러 단어를 자기 만의 식으로 말해서 듣는 사람 모두를 헷갈리게 하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