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처음 만나는 억양과 마주칠 때는 어쩔 수 없이 버퍼링이 생기곤 한다. 이 버퍼링은 자전거를 아주 오랜만에 탔을 때 초반에 약간 휘청거리다가 곧 중심을 잡는 것과 같은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영어는 더 이상 영어 그 자체의 언어라기보다 '세계 공용어'라는 새로운 언어 같은 느낌이 불쑥 들기도 하고, 영어 공부는 아니 언어 공부는 끝이 없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공부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고 그저 해당 언어로 최대한 많은 콘텐츠를 보고 읽고 듣고 써 보는 것.)
하지만 보통 때보다 버퍼링이 오래 걸려 나를 당황케 만들었던 언어들이 있다.
1. 스코틀랜드 영어
우리는 크게 '영국 영어'라고 말하지만 한국어에도 지역마다 방언이 있듯 영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였다. 영어로 하긴 하는데 평소처럼 바로 귀에 꽂히지가 않았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데 평소에 영어를 할 때보다 더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영국 영어'는'잉글랜드 영어'였나 보다.
2. 호주 시골 영어
호주에서 로드트립을 할 때 중부 지역을 함께 들렀다. Ululu로 유명한 중부 지역은 사막과 광산만 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100km쯤 차를 타고 가야만 나타나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인 곳이다. 마을에 들를 때마다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브리즈번, 시드니 같은 도시 사람들의 영어와는 또 달랐다. 이 작은 한국이란 나라에도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는데 대륙과도 같은 호주는 어떨까. 카우보이 복장을 좋아하는 호주 사막 아저씨들은 차림새만큼이나 껄렁? 하고 설렁설렁 말했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 미국 횡단 여행을 한 많은 사람들도 각 주마다 다른 영어 스타일을 알아먹느라 식겁했다는 걸 보면. 역으로 서울에만 살던 외국인이 대한민국 투어를 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 가게 되면 그 역시 분명 이런 것을 느끼겠지.
2주 간 로드트립했던 경로
3. 아일랜드 영어
동남아를 돌며 영어를 가르치던 아일랜드 친구가 있었다.
"그래 내가 잉글랜드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덕분에 내가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도 먹고 사네."
아일랜드는 자기들의 모국어(아일랜드어 혹은 게일어라고 불리는)가 따로 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오래 지낸 터에 영어도 함께 구사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일랜드어를 구사하는 사람보다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아일랜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과 말해 본 적도 있겠다, 뭐 영어로 된 영화니까 별 부담 없이 선택했는데 곧 멘붕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들은 영어 중에서 가장 영어 같지 않고 가장 들어먹기 힘들었다. 영어인 듯 영어 아닌 영어 같은 너... 그때 알았다. 이게 진짜 아일랜드 사람들의 영어라는 것을. 외국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아일랜드 영어 선생님들은 본인들의 억양을 잘 관리(?)해서 외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때다.
호주, 싱가포르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싱가포르인이 약속이 있어 먼저 떠났다.
"야 근데 싱가포르 영어 왜 이래? 너무 이상하다. 너 괜찮아?"
"ㅎㅎㅎㅎ 아 나야 뭐 익숙해졌으니까."
호주 사람이 못 알아들어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다. 싱가포르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에겐 좀 별로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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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싱가포리안 보스가 호주 지사의 사람과 막 통화를 마쳤다.
매일 이메일로만 소통하다가 처음으로 통화를 한 그의 한줄평.
"얘네들 영어 뭐 이래? 아휴 힘드네. 왜 이렇게 말을 하다 마는 것 같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조차도 서로의 영어를 디스 하는 것에 빵 터졌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 디스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단지 서로가 너무 낯설어서 그런 것일 뿐. 이렇듯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영어를 들으며 당황할 때가 있는데 영어 네이티브도 아닌 내가 당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그러니 영어 앞에 너무 쫄지 말자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