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전, AI 때문에 할리우드 종사자들이 데모를 한 뉴스기사를 본 이후에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기술이 발전하면 공장에 사람이 없어질 줄 알았더니 컴퓨터 앞에 사람이 사라지고 있어.”
“그러게.”
“나 그런 생각도 하고 있어.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내가 하는 일을 인공지능이 정말 다 가져가게 되면, 나 몸으로 하는 일로 다시 갈 거야.”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있을 때 내가 했던 일은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아, 물론 한국어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N잡러 인생
나는 한국과 싱가포르에서 사무직만 했던 사람이라 내가 뭘 하게 될지 정확히 뭔지 몰랐다. 그냥 일이 하고 싶었고, 지원했고, 면접 봤고, 합격했다. 관련 경력은 없었지만, 아픈 아빠를 돌봤던 내 경험을 면접 때 말했는데, 그게 유리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첫날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나는 일의 실체를 알고 솔직히 충격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가 전화 왔다.
"네가 생각하던 일과 다르지? 이 일을 딱 하루하고 나서 그만두는 애들 많다. 너 할 수 있겠어?"
아마도 트레이닝 후에는 이런 전화를 다 돌리는 모양인지 전화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아무튼 나는 거기서 내가 호주를 떠날 때까지 꽤 만족스럽게 일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말장난하는 것도 재밌었고, 누군가 나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뭔가를 해 준다는 느낌, 그것도 좋았다. 오전보다 오후 시급이 더 높고, 휴일에 일하면 거기서 또 1.5배 더 받는 것도 신나서 일요일 밤에는 항상 일했다. (놀면 뭐 하나 돈이나 벌지.) 물론 아픈 사람들 틈에 있으니 기가 빨리는 느낌도 자주 들었고, 내가 좋아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음날 출근했을 때 돌아가신 걸 봐야 할 때도 있었다..
Sunshine Coast, Queensland, Australia
솔직히 말해 그걸 하기로 결정한 건 급여가 높아서였다. 보통 워킹홀리데이로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최소 두 배 이상의 시급을 받았다. 물론 그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이 요양원은 엄청 짜. 다른 곳이 시급이 더 쎄거든."
지금 보면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요양원 같은 곳에서는 보통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들을 받아주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요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민자들이다. 호주의 경우, 호주에서 계속 살 사람들이거나(실제로 호주 사람과 결혼한 외국인 여자들이 많았다.), 아니면 간호사 학위를 따며 관련 경력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주로 일하는 곳이 여기였다.
사무직을 숭상하는 한국에서 온 사람답게 나는 그 일을 한다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업을 존중하는 호주의 분위기에 곧 적응이 되었다.
“안 더러워? 밥 먹이고, 뒤처리하고 씻기고 이런 거 괜찮아?”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것도 다 적응이 되더라. 지금은 정말 아무 느낌 없어. 그냥 일이야.”
지금 보면 그 일이 내게 준 가장 큰 장점은 내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직업에 대한 선입견과 경계를 허물어준 것이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사무직과 현장, 그 어떤 것이든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기꺼이 일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나는 그럴 수 있는 인간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후에 싱가포르로 다시 갔고 거기서 다시 사무직 일을 갖게 됐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그게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해 준 곳이 바로 호주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아기를 낳고 기르다 보니 그때 요양원에서 배웠던 걸 육아하며 잘 써먹게 됐다. 역시 세상에 쓸데없는 경험은 없다. ^^
“AI나 기계가 어른이나 아기를 돌보는 건 정말 힘들 것 같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게 이런 일이 아닐까?” (노인 돌봄 로봇이 이미 나와 있긴 하지만.)
“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중에 이놈들이 내가 할 일 다 가져가면 그런 일들 하러 갈 거야.”
“그래도 되지. 그런데 내 생각에는 요양원 일보다 아이 돌보는 일이 더 오래갈 거 같아.”
“왜?”
“사람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보니까. 로봇이 내 부모를 돌보는 건 참아도 자기 자식을 돌보는 건 못 참을걸?”
"아... 그런데 그런 일들도 좀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로봇이 돌봐도 되지만,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겠어? 결국 인간 프리미엄이 생겨나지 않으려나?"
남편과 뭐 이런저런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창작이야말로 인공지능이 손대지 못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결국 선입견에 불과했다. (아, 물론 인공지능이 한 창작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은 한다.) 우리가 블루칼라라고 생각했던 직업들이 오히려 그 수명이 오래갈지도 모르겠다. 지금 AI가 위협을 가하는 직업은 급여가 높은 직업이고, 그런 직업을 AI로 대체할수록 사용자 입장에서는 이익이 더 커지겠지. 아마 대체가 늦어지는 직업들은 급여가 그리 높지 않아 사용자가 대체할 만한 수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안타까운 점이긴 하지만.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그러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직업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지금만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