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텔레르, 처칠 공원, 인어공주 상
덴마크에서의 마지막 날, 나를 3일 간 재워준 엠마뉴엘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이클리스트 복장을 하고 출근하기 전 정원의 잡초를 뽑으면서 거래처 사람과 통화하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매일 왕복 30km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아이들의 학교 캠프에도 참가하고, 아이들의 다양한 경험을 위해 카우치서핑 호스트도 하는 이 사람의 모습은 내게 '북유럽 아빠'의 좋은 예로 남게 되었다.
집을 나서 트레인을 타러 가는 길.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길가에 핀 꽃 하나도 그저 스칠 수가 없다. 자세히 보니 무궁화가 피어 있다. 코펜하겐의 주택가에서 이렇게 무궁화를 알아보다니, 대한민국 국민이긴 한가보다.
코펜하겐의 마지막 날 그래도 인어공주 상을 봐야 하지 않겠냐는 관광객의 심리가 발동하여 찾아가던 중, 이왕이면 자동차가 다니는 큰 도로보다는 공원을 통해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운 좋게 얻어걸린 이 곳, 카스텔레트 (Kastellet). 으레 그렇듯 잔디밭이 넓게 펼쳐질 것으로만 기대했는데 적당히 큰 호수와 군대 주둔지로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예전 건물과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던 꽤 볼만한 곳이었다.
공원 내의 적당한 구릉지대가 있어 순찰을 하거나, 적으로부터 피하거나 숨어서 공격하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덕분에 평평한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보다 더 큰 운동 효과를 볼 수 있고, 언덕 위에서는 가까운 바다의 모습도 볼 수 있는 예쁜 공원이었다. 그 때문일까. 나는 인어공주에 대한 생각을 잊고, 언덕을 올라가 공원과 코펜하겐 시내를 번갈아 보며 그저 이 곳에 서 있는 것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목적했던 곳을 가는 것보다, 그곳에 가는 길에서 찾는 것들이 보물인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 이 공원도 딱 그렇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지으며 인사해 주는 코펜하겐 사람들 속에 잠시나마 섞여 있을 수 있는 곳. (이 곳이 공원이 아니라 코펜하겐의 북쪽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로 쓰였다는 건 덴마크를 떠난 뒤 알게 됐다.)
호수의 바로 옆에는 성 알반 교회가 카스텔레트의 잔디밭과 어우러져 유럽 엽서 사진의 이미지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 근처에는 이렇게 처칠의 동상까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교회도 영국식 교회라고 한다. 카스텔레트 요새가 그랬듯 때로는 사전 지식 없이 무언가를 보고 즐기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라고 쓰고 싶은데 난 사전 지식 없이 하는 여행이 한 70%정도 된다...
이 부근이 관광객들에게 노다지와 같은 곳인지 교회 근처에는 코펜하겐의 셸린 섬의 탄생신화의 주인공 '게피온 여신'과 황소들이 조각된 '게피온 분수'가 있었다. 물속에서 소를 몰고 있는 터프한 모습의 여신. 하지만 이 게피온 분수보다는 분수 주변에 전시되어 있는 클래식카가 내 눈길을 더 끌었다. 그 독특한 모양과 아름다운 곡선에 정신이 팔려 몇 장 찍어보려고 꽤 오래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시 정신 차리고 인어공주상을 보러 가다가 발견한 대형 크루즈. 대형 컨테이너선이 아니면서 이렇게 큰 배는 처음 본다. 각각의 칸이 마치 호텔방과 같은 거구나. 이 크루즈는 어디를 갈까? 그리고 비용은 얼마나 될까? 내 버킷리스트에 있는 남극 크루즈 여행을 언젠가는 꼭 이루리라는 다짐을 난데없이 하며, 드디어 인어공주 상을 찾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은 크기의 청동상.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속 주인공들 중 거의 (아마도) 유일하게 새드엔딩의 주인공이라서 그럴까. 흐린 하늘과 더불어 더 우울해 보이는 인어공주. 이미 모여 있던 많은 관광객들은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각각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데르센 동상도 어딘가 있다고 하지만 관심이 없어 패스. 방정환 선생님 동상은 있는지도 모르는데 안데르센 동상은 찾아서 뭐해.
이미 해는 완전히 졌고,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코펜하겐의 밤을 혼자 즐겨야 하는 시간. 해가 진 후 여자 혼자서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안전한 도시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면서, 거리를 걸으며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어낸다.
'저 버스는 어디를 돌아다닐까?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정말 타고 싶었던 코펜하겐 파티 버스를 뒤로 하고 덴마크의 여왕과 가족이 거주한다는 아말리엔보그 궁전 광장을 지나, 프레데릭스 교회를 지나 조금씩 코펜하겐의 센트럴로 걸었다.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서 혼자 펍에 들어가서 술 마시는 일도 간간히 하고 있다.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서 저녁을 거르고 맥주 한 잔으로 때우는 일이 많아졌다.
역시나 오늘도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하고, 아무 골목 첫 번째로 보이는 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졌어도 문을 열고 혼자 들어가는 나를 일제히 바라보는 손님들을 보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테이블 4개, 그리고 바. 유럽의 중세시대가 떠오르게 만드는 펍의 인테리어.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곳에 어색하지 않은 척하며 맥주 한 잔을 시켜 바에 앉았다. 내게 말 걸지 않기를 바라면서 들고 다니던 책을 펴고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눈으로는 책을 읽고 있지만, 끼리끼리 술 마시고 잇는 사람들이 괜히 부러운 건 왜일까? 혼자 여행 다니는 게 외로워지기 시작하나 보다. 그 사람들에게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은 꿋꿋하게 맥주를 한 잔 더 시켜 마시고 그 펍을 나왔다.
조용한 골목, 저녁시간 옅은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벽돌 길에서 괜히 아련함을 느끼며 감상에 젖으려는 찰나, 멀리 술 취한 아저씨의 고성방가 소리를 듣고 서둘러 베를린 행 버스로 걸었다.
3일 동안 고마웠어, 코펜하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