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한강의 문장, 그리고 9살의 허세
한강 작가의 글을 읽는다.
그녀의 문장은 서늘하다. 베일 것처럼 예리한데, 덮고 나면 이상하게 속이 뜨겁다. 책장 어딘가에서 판자촌, 혹은 가난한 동네와 아파트의 경계에 대한 묘사를 읽었던 것 같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다만 그 '분위기'가 내 기억의 뇌관을 건드렸다.)
문득, 잊고 지냈던 내 12살의 등하굣길이 떠올랐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우르르 교문을 나선다. 떡볶이를 사 먹고, 문방구를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갈림길이 나온다.
잔인하게도 그 길은 정확히 'Y자'로 갈라져 있었다.
왼쪽은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 단지.
오른쪽은붉은 벽돌과 지붕이 뒤섞인 낡은 주택가.
내 집은 오른쪽이었다.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고, 밤이면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겨울이면 웃풍이 들어 코가 시린 집.하지만 갈림길 앞에 서면, 나는 태연하게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간다! 내일 봐!"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 나는 보란 듯이 아파트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는 척.
저 번듯한 브랜드 아파트가 우리 집인 척. 친구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아파트 단지 화단에 앉아, 개미나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들이 다 갔을까? 확신이 들면 그제야 도둑고양이처럼 다시 나와 오른쪽 길로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언덕을 오르며 생각했다.
'휴...'
가난이 죄도 아닌데. 그깟 아파트가 뭐라고.
고작 9살짜리가, 왜 내 집을 두고 남의 집 담벼락을 서성여야 했을까. 아마도 '쪽팔림'이라는 감정을 너무 일찍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은 아파트 평수를 물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 순진한 잔인함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어라곤,
아파트 쪽으로 걷는 그 짧은 연극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아파트로 가는 척한다고 내 가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결국 집에 도착하면 똑같은 찬물에 세수를 해야 했는데. 하지만 가끔은 그 아이가 안쓰럽다.
부촌이라는 시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집으로 가는 길조차 마음 편히 걷지 못했던
그 자그마한.
한강님의 글은 덮었지만,
내 기억은 아직 덮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왠지,
그 오른쪽 언덕길의 냄새가 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