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약을 삼킨 도박사

23화 : 매트릭스의 시스템 위에서 타짜처럼 배팅하기

by 현영강

인생 영화를 반지의 제왕만 뽑자니 아쉬워 하나 더 쓰겠습니다 :)


1999년, 세기말의 불안이 거리를 휩쓸던 시절.

나는 청소년이 돼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한 대 세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바로, 영화 '매트릭스'


화려한 총격신이나 슬로 모션으로

휘어지는 허리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전율하게 만든 건

그 미친 발상 그 자체였다.


이 세상이 사실은 0과 1로 이루어진

대한 가상현실이라니.


인간은 그저 기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전지에 불과하고,우리가 느끼는 맛과 향기, 고통과 쾌락이 모두 전기 신호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니.


도대체 어떤 뇌 구조를 가져야 이런 세계관을 축조할 수 있는 걸까. 소설가로서 나는 그 압도적인 상상력 앞에서, 박탈감을 넘어선 경외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SF가 아니라, 실존에 대한 가장 서늘하고도 완벽한 철학적 질문이었다.


영화 속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내민다.

거짓된 현실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파란 약.

그리고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빨간 약.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는 기계들이 지배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민낯을 보게 된다. 가끔 생각한다. 나라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겁 많은 나는 주저 없이 파란 약을 집어삼키고, 다시 따뜻한 침대에서 눈을 뜨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진실 따위 몰라도 좋으니,

맛있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가짜 행복에 취해 사는 삶.


불행하게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작가는 태생적으로 빨간 약을 삼켜야만 하는 형벌을 받은 존재들이라고, 감히, 나 스스로 되뇌인다. 남들이 보지 않으려는 세상의 이면을 들춰내고,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기어이 활자로 적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종족.


우리는 안락한 환상보다는

고통스러운 진실 쪽으로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설계된,

시스템의 오류 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매트릭스의 네오만큼이나,

타짜의 고니를 사랑한다.


어쩌면 뜬금없는 조합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사이버펑크 구세주와 화투판의 도박사라니.

하지만 내게 있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다.


고니는 말한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그는 자신의 손목을 걸고, 아니 자신의 인생 전체를 판돈으로 걸고 승부를 본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는 교훈을 비웃듯, 그는 불확실한 확률 싸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글을 쓴다는 것 역시 거대한 도박이다.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젊음을 판돈으로 걸고, 대중이라는 알 수 없는 상대와 벌이는 지독한 한 판 승부.


패를 깠을 때 그곳에 장땡이 있을지, 꽝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지, 아니면 데이터 쓰레기가 되어 묻힐지, 그 결과는 신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배팅한다. 고니가 아귀 앞에서 마지막 패를 뒤집듯, 나 역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엔터 키를 누른다. 쫄리면 뒤지시던가. 그 대사가 내 귀에는 쓰지 못하면 죽으시던가, 라는 작가의 환청처럼 들린다.


시스템이 정해준 대로 살기 거부하는 버그(Bug)처럼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배짱 하나로 판을 뒤집으려는 도박사.


이것이 내가 이 가짜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짜'가 되는 방식이다.


자, 판은 벌어졌다.




나는 내 손목 대신 필력을 걸겠다.

당신은 무엇을 걸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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