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멸망하는 세계의 블랙박스가 되어
기차가 멈춰 선다.
여기가 종착역인지,아니면 선로가 끊긴 절벽 앞인지는 알 수 없다.창밖을 본다. 풍경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인공지능이 최적화된 경로를 안내하며, 사람들은 더 이상 사색하지 않고 검색한다. 질문이 사라진 시대.
정답만이 넘쳐나는 이 효율성의 제국에서, 고민과 방황은 불필요한 데이터 낭비로 취급받는다. 나는 이 낡은 기차의 마지막 객차에 홀로 남았다.
내 손에는 여전히 스마트폰 대신 낡은 노트가, 검색창 대신 투박한 펜이 들려 있다.
사람들은 내게 내리라고 손짓한다.
거기 계속 앉아 있어 봐야 도태될 뿐이라고, 얼른 환승해서 이 빠른 속도의 쾌감을 맛보라고 유혹한다.
나는 내리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직감한다.
이 화려한 디지털 문명이 정전되는 순간,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것은 결국 아날로그라는 것을.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상이다. 우리의 기억도, 취향도, 심지어 감정까지도 0과 1의 신호로 변환되어 거대한 서버 어딘가에 저장된다. 편리하다. 영원할 것 같다.
하지만, 서버의 플러그가 뽑히면 그 영생은 순식간에 증발한다. 클라우드에 올라간 추억은 전기가 없으면 볼 수 없지만, 종이에 꾹꾹 눌러 쓴 일기장은 촛불 하나만 있어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쓴다. 나는 이 급변하는 시대의 서기관이자, 멸망해가는 인류성의 블랙박스가 되기를 자처한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기내식이나 편안한 좌석이 아니다.
그 마지막 순간의 비명,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승객들이 남긴 마지막 기도를 기록한 주황색 상자, 블랙박스다. 그것만이 사고의 진실을 말해준다.
나는 '글쓰기'가 바로 그 블랙박스라고 믿는다.
AI가 '사랑'을 정의할 때,
나는 사랑해서 아픈 가슴을 쓴다.
기계가 '죽음'을 생물학적 정지라고 분석할 때,
나는 장례식장의 육개장 냄새와
유가족의 마른 기침 소리를 쓴다.
데이터가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그 비릿하고 끈적한 삶의 질감들.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작가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할 유일한 당위다.
먼 훗날, 누군가 21세기의 인류를 발굴할 때.
그들이 발견할 것은 차가운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고뇌하고 아파하며 밤새워 남긴 우리의 뜨거운 문장들이기를 바란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이렇게나 불안해했고, 이렇게나 서로를 그리워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 애썼구나."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화석을 새기는 심정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나의 불안장애도, 나의 가난도, 나의 불면도. 이 모든 결핍은 기계에게는 없는 나만의 고유한 자산들이다.
완벽하지 않아서 아름답고,
부서지기 쉬워서 소중한 인간의 증거다.
막차는 멈췄지만, 나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선로가 끊겼다면 걸어서라도 갈 것이다.
나의 문장은 느리고, 나의 걸음은 비틀거리겠지만, 나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의 마지막 등불이 꺼지는 그 순간까지.
나는 쓰고, 쓰고, 또 쓸 것이다.
그리고 씀으로써, 나는 비로소 인간으로 남는다.
이것이 나의 생존 신고이자, 모든 활자 중독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타전(打電)이다.
글쟁이 파이팅! 활자 중독은 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