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사람인가?
내 서재 옆방에 임시로 기거 중인 사촌 동생 K의 하루는 완벽한 극단으로 직조되어 있다. '취업 준비생'이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목에 건 이 이십 대 후반의 영장류. 그녀는 놀랍게도 하루 24시간 중 무려 20시간을 이불과 혼연일체가 되어 가사 상태로 보낸다.
침대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이 방의 산소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혹은 그녀가 남몰래 어떤 맹독성 수면제라도 삼킨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맥박을 짚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하지만 기적처럼 눈을 뜨는 오후 5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 앞에 앉는 순간, K의 눈빛은 서늘하게 돌변한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맞추고, 두꺼운 토익 영단어장을 찢어질 듯 넘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fluctuate(변동하다), lethargy(무기력), procrastinate(미루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고발하는 듯한 단어들 위로 형광펜이 거칠게 횡단한다. 입술을 달팽이처럼 오물거리며 단어를 씹어 삼키는 이 3시간 동안, K는 세상 누구보다 맹렬하고 치열한 지식의 포식자다.
그녀 주변의 공기마저 학구열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하다. 그러나 정확히 3시간 뒤, 타이머가 울림과 동시에 그녀의 척추를 지탱하던 전원이 툭, 끊어진다.
"오늘, 뇌 용량, 초과."
허공에 대고 실없는 사망 선고를 내린 K는, 두꺼운 영단어장을 베개 삼아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5시까지, 다시 깊고 장엄한 동면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는 종종 내 주머니 속의 비상약 통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방문 틈새로 그 경이로운 생태계를 관찰한다.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요동치고 작은 소음에도 신경줄이 팽팽해져 늘 각성 상태를 견뎌야 하는 내 입장에서, K의 저 완벽한 '전원 차단' 능력은 부러움을 넘어선 어떤 경지처럼 보였다.
단 3시간을 불태우기 위해 20시간의
냉각기를 거치는 완벽한 방전과 충전의 굴레.
"어차피 취업 시장은 빙하기야.
내 에너지는 하루 3시간이 최대치라고."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던 K의 변명. 그를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서재로 돌아왔다. 세상의 가혹한 속도에 맞춰 스스로의 신경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플러그를 뽑아버리겠다는, 저 뻔뻔하고 명징한 생존 전략.
나는 얕은 헛웃음을 지으며, 내 몫의 피곤하고 예민한 활자들을 향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