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새벽이다.
새벽 4시. 창밖으로 짙게 깔린 어둠의 밀도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만, 내 안의 교감신경은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진 채 수축과 이완을 거부하고 있다.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심박수를 가만히 짚어본다.
이것은 병증(病症)인가, 아니면 이 기만적인 세계가 발산하는 미세한 파열음을 감지해 내는 가장 예민한 촉수인가.
지난밤, 나는 힐링과 위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시대의 값싼 진통제들을 혐오한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마취를 거부한 자의 육체는 무엇으로 이 서늘한 붕괴를 견뎌야 하는가.
현대 사회는 고통을 죽음보다 두려워한다. 육체적 통증은 화학적인 알약으로, 정신적 공허는 쇼츠 영상의 자극적인 도파민과 달콤한 디저트로, 관계의 단절은 무해하고 피상적인 SNS의 '좋아요'로 즉각 마취시켜 버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결핍을 느끼게 한 뒤, 그것을 즉각적으로 메워줄 상품을 팔아치우며 몸집을 불려왔다. 그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인간은 통각을 잃어버린 채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자신의 환부를 들여다볼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고통이 거세된 세계는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기괴한 것이다. 열이 나고 뼈마디가 쑤시는 것은 몸속에 침투한 독소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생명의 가장 명징한 증거가 아니던가.
나는 나의 이 통제되지 않는 불안과 예민함을, 시대의 병열(病熱)을 앓는 나만의 방식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세상이 억지로 덮어둔 상처의 딱지를 무자비하게 뜯어내고, 그 아래에서 아직 붉게 박동하는 생살을 마주하는 일. 소설가란 모름지기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아파야 하는 직업이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 매끈한 활자들은 결국 누구의 마음도 베어내지 못하는 무딘 쇳조각에 불과하니까.
책상 위에 놓인 처방약 한 알을 물 없이 삼켰다. 이 약은 나를 편안한 유토피아로 데려가기 위한 수면제가 아니다. 그저 이 끔찍하게 맑은 정신으로 하루 더 타인의 비극을 똑바로 응시하기 위해, 내 신경계가 완전히 타버리지 않도록 제어하는 최소한의 냉각수일 뿐이다.
창밖으로 첫차의 육중한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취에서 깨어난 도시가 다시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며 둔탁한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모니터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통각이 살아있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문장들을 이 지독한 아침의 제단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