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테이핑
현관문을 열자마자 건조한 종이 먼지 냄새와 접착테이프의 비릿한 화학약품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옆집에 사는 남자, H의 거실은 거대한 종이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백 개의 택배 상자들이 규격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천장까지 빽빽하게 쌓여 있는 기괴한 풍경. 얼핏 보면 지독한 저장강박증 환자의 집 같았지만, 이 공간을 지배하는 본질은 물건에 대한 탐욕이 아니었다.
"조심하십시오. 빈 상자들이라 건드리면 쉽게 무너집니다."
H가 신경질적으로 나의 옷깃을 피하며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상자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H는 매일 밤 인터넷 쇼핑몰을 유령처럼 떠돌며 물건을 사들였지만, 정작 내용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물건은 대충 분리수거함에 던져지거나 구석에 방치되었고, 그가 정성스럽게 갈무리하는 것은 오직 물건을 담고 있던 '빈 상자'뿐이었다. 그는 빈 상자의 이음새를 다시 투명 테이프로 견고하게 봉인한 뒤, 자신의 거실에 벽돌처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이 완벽한 직육면체의 공백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안심이 됩니다."
그가 텅 빈 상자의 겉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은 통제할 수 없는 소음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죠. 내 속도 텅 비어버린 지 오래고요. 하지만 이 상자들 안의 빈 공간은 완벽하게 내 소유입니다. 내가 테이프로 밀봉해 버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진공상태인 셈이죠."
그 서늘한 궤변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불규칙한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비상약 통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숨을 죽였다. 나의 예민한 교감신경은 이 꽉 막힌 종이 무덤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H는 스스로 쌓아 올린 이 텅 빈 공백의 요새 안에서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우리는 무엇을 채우기 위해 그토록 결제창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살아가는가. 어쩌면 현대인들의 소비란, 내용물이 아니라 나의 비루한 일상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줄 저 매끈한 껍데기를 향한 지독한 구애인지도 모른다. 속은 지독하게 비어있으면서도, 겉보기에 반듯하고 단단한 직육면체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안달하는 꼴이.
H의 거실을 빠져나오며, 나는 서재에 쌓여있는 나의 원고 뭉치들을 떠올렸다. 나는 타인의 상처와 비극을 끄집어내어 활자로 난도질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설'이라는 그럴싸하고 규격화된 네모난 책의 형태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는다. 그 활자의 성벽 뒤에 숨어, 나 역시 나의 통제할 수 없는 불안과 공백을 어떻게든 밀봉하려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 뒤로, H가 또 다른 빈 상자를 포장하기 위해 박스테이프를 길게 주욱 찢는 소리가 날카롭게 복도를 갈랐다. 그 건조한 마찰음이 밤새도록 내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