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에 남아 있기

책임 (2018.07.23. 월요일 폭염)

by 재생지

아침 회의 준비를 하다

잠시 멈췄다.


일이 예전처럼

집중되지 않는다.


곧 받아야 될 방사선 치료와

두 주간의 식이 조절.

그 모든 날을

계산해야 할 아내의 하루가

마음 한편을

무겁게 눌러놓고 있다.


책상 위에는

이런저런 서류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다.


결정해야 할 일,

구상해야 할 일,

그리고

미룰 수 없는 일들.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조건이 바뀌면

생각도, 판단도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 자리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머뭇거리고,

집중하지 못하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


떠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주는

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얹힌

의무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사람을 만들고,

또 사람이

상황을 만드는 순간들.


아마도

책임이라는 건

원할 때

선택하는 역할이 아니라,

힘들어졌을 때도

쉽게 내려놓지 말아야 될

무게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면서,

뒤로 물러설 수 없게 하는

마지막 감각 같은 것.


욕심만의 것도 아닌,

의지만의 것도 아닌,

그저

내가 회피하지 않고

여기 서 있다는 사실.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서류를 넘기며

다시 생각한다.


이 자리는

내가 선택해 온 자리이자

내가 남아 있기로 한

자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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