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시간

Day 5 (2018.08.12. 일요일 여름 볕이 유난히 선명한 날

by 재생지

아침 8시 30분,

숙소 1층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하루를 열었다.


‘오늘은 발길 닿는 대로 살아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머릿속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동선을 짜고,

시간을 계산하고,

하루의 리듬을 설계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습관이자

내가 세상을 살아내는 방식.


나는 아마,

이런 사람인가 보다.


오늘은

조조 영화 한 편으로 시작해

광장시장의 만두칼국수,

그리고

종묘와 세운상가로

이어지는 일정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나를 가장 오래 붙잡아 둔 곳은

종묘였다.


여름빛이 깊숙이 내려앉은

종묘의 정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찬란했다.


무성한 녹음 사이로

햇빛이 부서지고,

기척 없이 스며드는

느리고 무거운 바람이

조용히 지나갔다.


이곳은

조선의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자리.

살아 있는 이들의 시간과

떠나간 이들의 시간이

겹쳐 흐르는 공간이다.


종묘의 연못에는

물고기가 없다고 한다.


‘죽은 이를 위한 공간’에

굳이 산 것의 기운을 들이지 않기 위한

오랜 전통의 배려라고 했다.


그 배려가 만들어낸

묵직한 고요와 존엄.

그 두 단어가

이 공간 전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유교에서는

혼백을 하늘과 땅으로 나눈다고 한다.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어쩌면 이곳은

돌아올 길을 위해

남겨둔 자리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향한 기원과

땅을 향한 위로가

종묘의 흙과 공기 사이에서

조용히 번져 있었다.


‘악공청’의 의자에 앉아,

담장과 잔디가 맞닿은 그곳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족과 일,

그리고

모든 책임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지금.


내가 ‘여유’라고 부르는 이 고요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

느껴지는 여유.


만약

돌아갈 곳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이 감정도

여유였을까.

아니면

더 깊은 공허였을까.


누군가에게

'당연한 가짐'은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찾음' 일 수도 있다.


잃어보니 알겠고,

떼어내 보니

조금 더 또렷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돌아갈 자리’를 전제로

비로소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기에

혼자의 시간을

품을 수 있는 것인지도.


우리는 결국

향하고 돌아가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어제와 내일

사이의 시간에서

잠시나마

내 삶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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