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번호 위에 남는 시간

슬라이드 (2018. 10. 23. 월요일 흐리고 부슬 비)

by 재생지

거래처 연락을 위해

메신저 대화명을 검색하다가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지워야 할 이름을

목록에서 발견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던

거래처 분의 연락처.


차마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두었던 번호였다.


이제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시간 위에

그 번호가 놓여 있다는 걸 알기에,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다시 눌러본다.


화면에는

작은 생명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잠시

손이 멈췄다.

지우려다 말고,

그 번호가 지나온 시간을

망설임과 함께

조금 더 내려다보게 되었다.


사진들은

시간 순서대로

조용히 이어져 있었다.


혼자의 장면에서 시작해,

누군가와 함께한 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아이의 얼굴이

하루의 중심이 된 기록들.


이름도,

사연도 모르는 삶의 장면들이었지만

그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마치 흘러가는 인생의

요약본을 바라보듯,


한 사람의 시간이

어떻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인지.


사랑을 하고,

일상을 만들고,

책임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인지.


우리 대부분은

각자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아 보여도

크게 보면

비슷한 순서의 장면들을

통과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만남과 이별,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에 쌓이는

수많은 평범한 날들.


한 사람의 삶과

깊게 연결되어 있던 번호가

이제는

전혀 다른 인생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누군가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삶이 들어서고,

그 번호 위에

새로운 일상과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끊긴 것처럼 보이던

인생의 선도

누군가에게는

시작으로 이어지는 선이

될 수 있다.


그 번호를

그제야 지웠다.


지운 것은

연락처 하나였지만,

그래도

지워지지 않은 것은

그 이름이 머물렀던

시간이었다.


떠나는 자리가 있고,

이어지는 자리가 있고,

세상은 그렇게

큰 소리 없이

다음을 향해 넘어가나 보다.


마치

슬라이드를 넘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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