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법 (2018. 11. 02. 금요일 늦가을의 공기)
점심 자리에서
거래처 담당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
웃자고 하는 말이었고,
대화는 그저 그 자리에서
흘러가듯 지나갔다.
그런데 그 짧은 대화를 지나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세상을 나누고
사람을 나누는
문장들은 생각보다 많다고.
2011년쯤,
이사하기로 한 사무실의
회의실 문에
사람을 나누는 문장 하나를
꽤 진지하게 붙여둔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변명하는 사람과 결과를 얻는 사람
변명형 인간은
일이 안 되는 이유를 찾고
결과형 인간은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반응하는 사람이 아닌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라
- 알랜 코헨 -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마치 누군가가
등을 가볍게 떠밀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공격적이었고,
조금 더 진취적이었으며,
조금 더
세상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변명하는 사람과
결과를 얻는 사람.
그 두 문장은
내가 서야 할 자리를
분명하게 정해주는
기준이라 생각했었다.
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찾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머뭇거림보다는
결단을 택하는 쪽이
옳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세상은
그렇게 단정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결과를 얻고 싶어도
변명이 필요한 날이 있고,
변명 뒤에 숨고 싶어도
결과 앞에
서야만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누군가는
지금 결과를 만들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수없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변명처럼 보이는 시간을 지나
결국
자기만의 답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구를 떠올리면
묘하게 마음이 정리된다.
누군가를 재단하는 기준이라기보다는
그 시절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 같아서.
“오늘의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그때의 문장은,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작은 끌림을 남긴다.
그 끌림이 말하는 건
거창한 공격성이나
무조건적인 진취함이 아니라,
적어도
상황을 탓하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의 방향이라는 걸
조금 늦게야 알게 되었다.
사람을 나누는 말들은
여전히
세상에 넘쳐나지만,
그 틀에
나를 함부로
끼워 넣지 않는 법을
이제는
조금 배운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법은
어쩌면
사람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그 말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또 어떤 선택을 해나가야 할지
조용히 고민하고 내다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