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자리, 다른 시간

오버랩 (2018. 09. 10. 월요일 맑음 조금 가벼워진 바람)

by 재생지

을지로 4가 역.


2호선에서 5호선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옆,

작은 벤치 하나가 놓인 공간.


스무 해 가까이 지난 그 시절,

더 먼 미래를 꿈꾸며 옮겨본 직장.

서른 살의 어설픈 가장이

거기 앉아 있었다.


거래처 하나 없던

중고신입의 얼굴로.


걷고 또 걷다

잠시 쉬어갈 때면,

목소리를 가다듬고

낯선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한 대를 쥐고,

짧고 뻔한 멘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사무실의 능숙한 일꾼들 사이에서

그 말을 한다는 것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이 아닌

매번 다른 길가의 벤치를

자신만의 사무실처럼 사용했다.


이 지하철역의 벤치도

그중 하나였다.


지하철 소리에 묻히는 목소리,

끊기기 일쑤였던

건너편의 반응,

그리고 실패가 반복되던 날들.


몇 푼의 실적도 없던 나날들.


그 시절의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하루만 더,

한 주만 더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던 것 같다.


언젠가 이뤄질 거라는 믿음과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저울질하며 보낸 몇 해는,

결국

작지만 한 회사를 이루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많은 일에 섞이고,

또 많은 현실에 부딪히며

오늘의 시간까지 흘러왔다.


건성건성

되는 대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디고,

한 번 더 걸어갔던 시간들 속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 아닐까.


그런데 요즘,

갈 곳을 또렷이 정하지 못한 채

다시 이 길목에 선

나를 본다.


과거의 내가 앉아 있던 그곳을

지나쳐 가면서,

묘하게

현재의 나와 겹쳐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그때의 내가

전화기를 쥔 채

이쪽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마치 그때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넌 잘할 거야.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양심만큼만 걸으면

길은 이어질 거야.”


그 말이

지하철역의 소음보다

더 크게 들려온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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