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2018. 09. 16. 일요일 아침 공기가 조금 선선해진 날)
아내와 아침 운동을
함께하고 들어오는 길.
나란히 산책하는 두 노부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속도를 조금 더 늦춘 채,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두 손을 잡고
서로를 지탱하듯 걷는 모습.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 같지만,
언젠가는 닿게 될
노인의 시간을
잠깐 상상해 볼 수 있었던 아침이었다.
그 장면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차에,
문득
생각을 붙잡는 글이 떠올랐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에서는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자신이 살아온 삶이
진짜였는지를
비로소 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두려움에 잠식되는 일이기보다는,
삶의 결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일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종종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어느 순간
등을 떠미듯 지나친
시간의 감각을 만날 때가 있다.
그제야
하루가 얼마나 짧은지,
지금의 순간이
얼마나 쉽게
지나가 버리는지를
조용히 깨닫게 된다.
노후란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지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끝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오늘의 온도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고,
사소한 장면 하나에도
마음이 반응한다.
두려움보다는
겸허함에 가까운 감정으로,
소란보다는
고요 쪽으로.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삶을
조금 더 깊게 살아내게
만드는 쪽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가벼운 소비 대신
진짜 원하는 것을 떠올리고,
습관적인 말들 대신
마음을 담은 눈빛을,
그 사람의 얼굴을,
그 온도를,
한 번 더 느끼게 한다.
노후라는 시간은
삶이 정리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삶의 윤곽이
가장 분명해지는
때일지도 모른다.
끝을 의식할수록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에 나란히 걷던
그 뒷모습처럼,
아직은 멀지만
언젠가 닿게 될 시간을 떠올리며
오히려
살아 있는 나를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도,
그 시간까지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