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가 주는 선물

숙성 (2018. 11. 16. 금요일 흐린 늦가을 하늘)

by 재생지

언제부터인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감정을 잘 숨기고,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사람.

흔들리더라도

함부로 쏟아내지 않는 태도.


그게 갖춰야 할 모습 중 하나라고

막연히 믿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수술 이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낙폭을

진동처럼 느끼고 있다.


이유 없이도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올라온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은

조금 달라진 같다.


이게 마음의 상처인지,

아니면

상처가 나를

조금 더 성장하게 만드는 것인지

가끔은 헷갈린다.


외근 길,

도로 옆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 내 무성하던 잎은 떨어지고

열매만 고요히 남아 있었다.

곧 그 열매마저 사라지면

마른 가지만 남겠지.


그 모습에서

나를 포개어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을 다 살아본 기분이다”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꺼내고 있었으니까.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정답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착각.

그 말들이

한동안 마음에 걸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꿈을 꾸었고,

청사진을 그렸고,

기대와 실망, 배려와 배신도

적당히 겪어 보았다.


그러다

병을 알게 되었고

막연하게나마

‘죽음’이라는 다음 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아직 젊다고 믿었고

더 가져야 할 것들만

나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단어를

지난 몇 달간 떠올려 본 후,

삶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온 듯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행복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를 포함하는지.

삶은 어떤 의미를 품어야 하는지.


이런 질문은

세대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찾아올지 모른다.

다만

유한성을 의식하고 난 뒤의

이 물음표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결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내가 조금 더 빨리 늙어가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하지만

늙음이라는

침잠에 가까운 게 아닐까.


살아온 시간이 겹겹이 쌓이며

마음이 조금 더

깊어지고 있는 것.


강하지 않아도 괜찮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고,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올해 받아 든

어려운 숙제의

답은 아직 없지만

물음표를 붙들고 있는 시간 자체가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의 과정 속에서

행복의 결도,

생각의 자유도

함께 얻게 되는 게 아닐지.


그래서 이 한 해는

늙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물음표를 선물 받은 시간.


답이 없어도 괜찮은,

적어도 나에게는

조금 다른 깊이로 건네받은

사유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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