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베이스기타 입양하다

오타쿠의 심금을 울리는 베이스, 취향 존중해 주시죠?

by 이소연



나는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접한 세대로 뿌리 깊은 오타쿠 세대이다. 일본 문화에 익숙하고 그만큼 다양한 만화와 장르를 접하면서 그와 동시에 J-Pop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확실한 취향을 구축하기까지 숱한 시행착오와 여러 찍먹의 과정들이 있었으나 결국 돌고 돌아 J-Pop 밴드 특유의 경쾌한 리듬과 종잡을 수 없는 가사 그리고 독특한 멜로디에 사로잡혀 지금까지도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J-Pop 밴드로 가득하다.


그런 J-Pop 마니아들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악기가 있는데 그것은 '베이스 기타'. 하지만 비쌀뿐더러 한국에서 악기를 칠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고이 모셔두고 꿈만 꾸던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동차 블랙박스를 설치하기 위해 잠시 나의 차를 서비스 센터에 고이 모셔두고 잠시 근처에서 시간도 때울 겸 기타 센터로 향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후끈거리는 열기와 땀 내음, 그리고 엄청난 분량의 악기들에 압도당했다. 형형색색의 기타들과 현란하고도 종류가 많은 어쿠스틱,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베이스 기타까지 다 모여있었다. 악기들만 구경해도 황홀한데, 심지어 이곳엔 시범연주도 가능한 곳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연주하는걸 버스킹 공연처럼 구경하던 도중, 나의 눈에 들어온 중고 베이스 기타가 있었다. 초록과 하늘 그 경계에 있는 오묘한 청록색, 그리고 묘하게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의 적당한 크기가 좋았다. 디자인이 클래식하면서 너무 올드하지 않았고 나와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었다.



이 아이다.


내가 만약 이사를 다 완료해서 베이스 기타를 칠 여력이 된다면 이 아이로 고르겠어. 이 아이를 데려와야지 하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미리 사진도 찍어두고, 베이스 기타를 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간단한? 준비물도 미리 예습해 갔다.


그리고 대망의 이사가 다 끝난 날. 우연히도 교회 끝나고 시간이 남아 기타 센터로 향했다.


그 1달 동안 누군가에게 팔렸다면 우린 운명이 아니거니 하고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1달 뒤에도 내가 점찍은 그 아이는 묵묵히 천장에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베이스 기타 치곤 중고매물이어도 꽤나 상태가 양호했고, 색도 독특하고 디자인도 예뻤는데. 심지어 중고라 가격대가 괜찮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타보다 찬밥신세인 베이스 기타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다행히도? 내가 데리러 갔을 땐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엔 렌털을 신청하여 빌릴 예정이었는데 이 아이는 빌리는 게 안되고 오직 판매만 가능하다고 하셔서, 망설였다. 그러자 가게 주인분께서 직접 시범 연주로 나의 심금을 울려버렸고, 화룡점정인 슬랩을 쳐 버리셔서 나는 이미 그 베이스 기타에 마음을 뺏긴 상태였다.


그리고 이럴 줄 알고 미리 예습한 베이스 기타를 치기 위한 준비물들을 하나씩 읊어드렸더니 주인분께서 좀 놀라신 눈치인 듯했다. 이 아이, 의외로 진심으로 베이스 치려고 한 건가 라는 눈치인 듯했다.


일단 기본 준비물은 앰프, 앰프와 기타를 연결할 와이어 선, 기타 거치대, 기타 가방, 스트랩 줄 그리고 밤에도 연주할 계획이라면 헤드셋이 필수다. 이렇게만 갖추어도 웬만해선 다 갖추었다고 봐도 된다.


그 이후에 필요한 정비가 생기면 그 이후에 줄을 사던, 뭔가 더 필요한 부품을 사겠지만 우선 나는 취미로 칠 예정이라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위의 물품들만 구매했다.


가게 주인분께선 나보고 베이시스트가 기타리스트에 비해 많이 없어서 늘 밴드에 섭외 대상 1순위라며, 나보고 틈새를 잘 노려보면 인기스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우선 그만큼 실력이 늘어야 그것이 가능할 터.

하지만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스스로 좋아하는 악기를 샀다는 그 경험만으로 아주 짜릿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독립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는 것. 그만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선 책임감도 뒤따르겠지만 그 너머엔 내가 내 취향으로 나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렇기에 그토록 몇 년 동안 염원하던 베이스기타를 드디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앰프에 연결하고서 "둥..." 하고 줄을 튕기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묵직한 줄에서 나오는 그 소리의 중후함이 나로 하여금 잘 샀다는 확신에 신뢰를 더해주었다. 가격은 물품들 덕분에 엄청 싸진 않았지만 주인분께서 와이어 선을 공짜로 주신 덕에 그래도 좀 할인받아 사게 되었다.


지금도 힘들거나 여유롭거나 한적할 때, 치고 싶을 때 베이스를 들고서 치고 싶은 곡을 따라 쳐본다.


줄을 튕기며 베이스가 내는 묵직하고 중후한 저음이 왠지 모르게 위안을 준다.


나를 위로해 줄 악기가 있다는 건, 참 좋은 거란 걸. 새삼 깨닫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