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데 영감을 주는 요가의 효과
요가를 정말 처음에 시작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때의 나는 내 몸과도 친하지 않았고 나의 몸을 바라보는 것이 마냥 어색했다. 더욱이 내 몸을 써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점점 틀어지고 망가져 가는 내 몸을 바라만 볼 수도 없었다. 엄마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나는 개인 피티를 받으면서 내 몸이지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몇 년을 함께해온 내 몸인데 이렇게 못 움직인다고?'
등 뒤 견갑골을 모아 아래 허리 쪽으로 내려야 한다는 그 간단한 말이 내겐 너무 험난한 지령으로 느껴졌다. 견갑골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거니와 몸이 이리저리 피둥피둥 살이 쪄서 나의 견갑골은 그때 당시엔 살 속에 파묻혀 발골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어색하지만 조금씩 나의 몸을 움직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당연히 할 수 없게 된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몸의 감각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이 익숙해졌다. 점점 한 동작에 오래 머무를 때마다 시간에 따라 몸의 느낌이 달라짐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대를 준비하는 것을 잘 아셨던 요가 원장님께선 종종 내게 물어보곤 하셨다.
"지금 이 동작을 할 때 어떤 색인지 알려줄래?"
미술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각의 색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을 알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감각적 집중을 다 하여 최선을 다해 그 느낌에 대해 답해드리려 했다. 그 '색'은 항상 달랐다. 어쩔 땐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그리고 하얀색일 때도 있었다. 물론 대충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엔 나름의 철학이 담겨있었다. 예를 들어보면, 동작을 계속 지속할 때엔 고통이 오랫동안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고통에서 초월하는 때가 온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의 텅하니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떠오르지도 않은 그 찰나의 순간이 내겐 순백의 하얀색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어떤 감각은 하얀색이라 답해드렸다. 나의 대답을 들은 원장님의 표정엔 항상 웃음이 있었다.
나는 예술이 모든 분야를 초월하는, 서로 통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때 공예, 디자인, 전시회 등등 다양한 미술 활동을 경험하고 엄마와 함께 연극, 음악회, 공연 등을 보면서 내가 몸소 느끼고 깨달은 바이다. 음악회에서 들었던 음악적 감성이 공예를 할 때 고스란히 묻어나고, 전시회에서 본 그림의 색채감을 통해 공연을 보면서 배우들의 연기에서 묻어 나오는 색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예술적 경험을 하고 폭넓은 예술을 접하면 한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 또 다른 예술이 융합되어 나올 수 있다. 그렇기에 엄마와 나는 '경험'을 하는 걸 중요시하는 편이며 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의 경험도 예술적 감성을 키우는데 도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창작이란 것은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라 그간 내 속에서 축적되어온 경험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봤을 때 '요가'는 나의 감성을 건드리기 충분한 존재이다. 몸의 감각을 깨우고 몸의 느낌을 통해 또 다른 감성을 키워주었다. 요가가 내게 몸에 대한 감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체험한 '누드크로키'에서 깨달았다.
처음엔 누드를 보는 것이 어색했던 새내기 시절. 남성의 근육질적 몸과 생식기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크로키의 강렬한 매력에 빠져들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 속에서 내 마음에도 교수님 마음에도 드는 크로키 몇 작품들이 생겨났다. 위의 크로키는 펜으로 종이에서 떼지 않고 한 번에 그린 크로키이다. 그 속에서 나오는 면들을 연필로 색칠해주면서 명암을 주었다. 나의 크로키엔 아주 강하게 새까맣게 칠해진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보면 새까만 부분들이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묘사할 건 다 묘사했다는 느낌이 든다.
같은 남성 모델이지만 매 순간 다르게 묘사해보려 시도했다. 3분은 참 짧은 시간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인물의 전체적 동세를 잡아내고 묘사를 한다는 건 과감해야 한다.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실로 엄청난 내적 도전이 아닌가 싶다. 요가를 하면서 몸을 바라보고 요가 동작을 취할 때 느껴졌던 감각들이 내겐 큰 경험이 되어주었다. 크로키를 하면서 몸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몸의 근육들과 몸의 선 그리고 인물의 감정이 내게 전해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손은 고스란히 그때의 감각, 감정, 느낌들을 선으로 표현해내었다.
여성 모델분이 오셨던 때도 있었다. 여성 모델분의 표정엔 항상 당당함이 묻어났고, 자신 있는 역동적인 자세들을 마음껏 표현해 주셨다. 나는 남성의 몸과 또 다른 여성의 풍만한 곡선과 육감적인 살의 명암을 생생히 보았다. 그리고 여성 분의 자세를 통해 지금 어떤 감각을 느끼고 계실지도 잠깐 상상해보기도 했다. 개인 피티를 받을 때 가끔 5분에서 10분 동안 한 자세를 유지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고통과 간지러움과 그 외 여러 가지 것들이 느껴진다. 저 여성 모델 분은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실지 내심 짐작하면서도 궁금하기도 했다.
대학에 와서 새로운 재료를 써보겠다며 콩테를 샀던 기억이 난다. 그 재료로 무언가 그려보고 싶어 그려본 크로키이다. 묘사하고 싶은 부분만 강렬하게 포인트를 잡고 묘사를 했으며 나머지 부분들은 과감하게 날려버렸다. 과거의 나는 내가 생각할 적에 훨씬 과감했던 면이 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그 과감함이 잠시 사라져 버리거나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 같지만 말이다. 요가를 하면서 몸의 세부적인 감각들을 느껴질 즈음 대학교 1학년이 되었고 그 감각들이 내게 인체를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림은 감성이 중요한 작업이기에 많은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많이 보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많이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나의 주장도 이러하다. 많이 느끼는 것이야말로 많이 그린 것과 다름없다고! 디자인 입시를 하면서 인체를 얼마나 그려보겠는가. 그럼에도 대학교 1학년 때의 크로키들은 내가 중학생 때 그렸던 인체와는 훨씬 다르게 감각적으로도 비율적으로도 정제되었다. 분명 '요가'의 힘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드로잉 과목을 수강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린 크로키들. 크로키 무료 사이트는 검색하면 상당히 나오기 때문에 가끔 모델을 찾기 힘들거나 소재가 떨어졌을 땐 사이트에 들어가 크로키 연습을 하면 아주 도움이 된다. 시간도 재주기 때문에 편한 것도 장점. 이땐 요가를 하면서 몸이 더욱 좋아지고 정돈된 때이다. 그리고 근력이 상당히 늘어나면서 도전적인 자세도 수련하기 시작한 시점. 그래서인지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도 힘차다. 그리고 1학년 때와 다르게 더욱 과감하게 생략해버리고 더 짧은 시간 속 얼마나 동세를 잡아낼 수 있는지 계속 실험했던 것 같다. 이땐 주로 모델이 현대무용을 하는 무용수였다.
1학년 때 몇몇 크로키는 연필로 밑그림을 좀 작업한 다음 바로 다른 재료로 구체화시켜 나갔다면 2학년의 크로키는 훨씬 과감하고 선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친다. 밑그림은 일체 없고 몸의 큰 곡선으로부터 쭉쭉 다른 곡선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보인다. 그리고 색연필로 세부적인 명암과 근육들의 명암을 묘사했다. 이 모델의 근육이 내 마음에 상당히 와닿았던 것이 분명하다. 요가를 하면서 점점 근육에 대한 욕망이 흘러넘칠 때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보니 감회가 또 새롭다.
이 외에도 나의 대학 생활 속 많은 과제들을 할 때 요가할 때의 경험, 감각들이 많은 영감을 주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창작이란 것은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그 고통은 겪어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에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한 모든 경험들의 축적이 결국 예술적 영감, 감성으로 연결되어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감각과 감성에 예민하다. 그렇기에 분명 무엇을 경험하던 그것은 큰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바쁜 삶에 치여 잠시 잊고 있던 크로키. 이제 펜 들고 오랜만에 그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