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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Sep 18. 2022

죽음을 생각하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려본다

 요즘은 날이 서늘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다. 하늘은 드높으며 푸르다. 날이 좋을 때 나는 어김없이 밖을 나서곤 하는데 지금과 같이 졸업작품으로 정신없이 바쁠 때도 마찬가지다. 가끔 버스를 타면서 바깥 풍경을 보며 여러 가지 사색에 잠기곤 하는데 나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작업만 할 땐 온갖 잡념과 세상 걱정 고민들이 밀물과 썰물이 서로 번갈아 오듯이 혼미해진다. 그러나 바깥을 나가 드넓은 구름을 바라보자면 내가 걱정하는 것들은 하등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참으로 사람 마음이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엉망진창 정신없이 돌아가는 마음속과는 다르게 바깥세상 속 풍경들은 고요하다. 그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죽음을 떠올린다. 갑자기 죽고 싶어 졌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언제든 떠올릴 수 있고 우리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작년 요가 지도자 과정을 거치면서 요가 에세이를 쓸 때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또 다른 감정과 생각이기에 이번 기회에 글을 적으며 비교해보려고 한다.


에세이 주제는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이었다. 에세이를 쓸 적에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내일이 오기 전,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숲 속으로 홀로 가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건 나 자신뿐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나의 시신을 보고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온전히 죽음을 나 혼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요즘은 작년과 사뭇 다르다. 졸업작품을 진행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 쳇바퀴 속에서 드문드문 밀려오는 사색의 향연에 잠기는 순간들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죽음을 아주 선명히 의식하고 있다. 작년엔 마냥 짐작하기만 했다면 이번엔 조금 더 확신이 생겼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보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며 내가 좋아하는 혹은 아주 새로운 곳으로 찾아 떠날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웃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오기 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평소 생활하던 곳으로 돌아가 잠들면서 죽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죽는다면의 결말이다.


올해 나는 4학년을 맞이하고 학기를 보내며 좋은 일도 겪었고 안 좋은 일도 겪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졸업작품 제작을 고민하기보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졸업작품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수님과 학우들의 피드백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완성해나갔고 지금은 어느덧 최종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속도가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잠들기 전에 되물어본다.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나?



예전의 나는 남들과 비교도 많이 하고 남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의 나는 현재에 충실한가. 현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마치 요가 수련할 때처럼. 정신없이 흘러가는 와중에도 나는 늘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를 되짚는다. 때론 허무하게 보냈어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나의 하루하루를 나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열심히가 뭐든 많이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당장 내가 내일 혹은 지금 죽어도 후회되지 않나? 라 했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의 경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혹은 청량한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런 자문자답을 한다. 버스를 타고 풍경을 바라볼 때도 한다. 요즘 나는 그런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의 나는 무엇이 그리 급했고 그리 욕심 많았나. 후회로 가득가득했던 생각들 속에서 조금은 빠져나와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이켜보았을 때 나는 나름 열심히 살았고 열정적이었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았다. 후회가 많았지만 그렇기에 후회가 없는 삶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며 그 일에 몰두하는 현재와도 같은 삶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그 속에서 안 좋은 일은 좀 덜 겪고 싶은 소망이 있지만 말이다. 요가에선 사바아사나 송장 자세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누워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가장 어려운 자세이다. 내가 따로 집에서 혹은 자취방에서 요가 수련을 해도 절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세가 바로 이 사바아사나다. 이 자세만큼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요가원에서 하는 것만큼의 몰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요즘 이 사바아사나를 대체하여 죽음이란 생각을 많이 하나보다. 죽고 싶다가 아니라 지금 죽어도 좋을 만큼 현재에 몰입하며 살아가는가를 되뇐다. 그리고 이제야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오늘도 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죽음에 대해 자연스러운 고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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