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얼굴로 뚫어져라 책을 내려다보는 주인공과 순간의 본능과 느낌에 충실한 한 마리의 동물인 조르바. 매사 결정을 내리기 전 저울에 눈금을 다는 주인공과 동물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니 자신은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자유가 주어져야한다는 조르바.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물론 거인의 어깨 덕분이다. 그분의 영향이 아니었으면 나는 조르바를 끝까지 읽지 않았을 거다. 지적 허영이 많은 나는 언젠가 그분이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듣게 됐다. 그리고 <영혼의 자서전>이란 책에 대해 또 듣게 돼 카잔차키스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다.
전에도 한 번 언급했지만 이 책은 내게 그렇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현실에서 조르바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를 봤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조르바를 만난 나는 그래서 시큰둥했다.
그랬던 조르바였는데 저자는 내 안에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었다. 성과 속을 탐닉해 본 작가 이력을 봤을 때 카잔차키스는 예사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수작이면 내가 놓친 어떠한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건 빗나간 이야기지만 때론 쓸모없는 게 중요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누누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강조한 게 딱하고 바로 알 수 있는 ‘감’과 ‘용기’에 관한 거다. 물론 나도 이건 어느 책을 보고 알게 된 거다. 카잔차키스는 이 책에 이 둘을 넣어 뒀다. 조르바로 대변되는 본능대로 사는 동물의 삶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붓다와 베르그송 그리고 니체에 깊이 몰입한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해체와 창조를 이야기한 인물들이다. 그는 붓다를 통해 삶 너머의 의미를 추구했다면, 베르그송과 니체를 통해서는 삶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을 것을 통찰했다.
조르바를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이 글은 불필요했을 거다. 그는 머리를 굴리며 정답을 찾아가는 사람이기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며 배짱 좋게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직도 나는 창백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건 바로 ‘용기’가 부족해서일 거다. 그래서 여전히 저울에 사건을 올려 그 무게를 잰다. 그리고 ‘감’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직관적인 편이라 감이 좋지만 겁을 먹고 있어 그걸 쓰지 못한다.
현대 인문학이 중요시 여기는 이 두 가지 점을 카잔차키스는 1946년에 소설로 발표했다. 삶에 일관된 사람은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사유를 한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를 만나며 내 안에 샘솟던 느낌도 자유였다. 그는 현실의 짐에 옭아 매인 독자들을 풀어 해체해 주었다. 이게 속세에서의 그의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보자.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가슴 떨리는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홀가분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역시 다시 정리해 보면 자유와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팁 하나 남기면, 이 책은 삶이 편안하게 흘러갈 때 그러니까 살아가는 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을 때 읽으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을 삶의 파도가 휩쓰는 걸 방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 조르바를 만난다면, 예측하지 못했던 모험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갈 거다. 이 불안정성, 그게 삶이라고 카잔차키스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