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가 행복은 결과라 했다. 이분은 행복이란 단어를 혼동하고 있다. 행복은 처음에도 있고, 끝에도 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초반에 짜릿하고, 흥분한 것을 중요시했다. 행복은 그 후에 찾아오는 별것이 아니라 했다. 이쯤 되면 행복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행복이란 무엇일까? 존경했던 선생님 버전으로 말해 본다. 지금 이 순간을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지금이 너무 기쁘고 좋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즐기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도 능력인 것이다.
내게 행복을 묻는다면, 역시 김어준 총수 버전으로 말해야 한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아니면 행복한 척하는가.’ 우리는 행복을 오해하기 쉽고, 착각에 빠져 있다. 많은 사람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또한, 자기 인생을 생각만으로 행복하다고 오해한다.
사실 행복은 이렇게 말로 따질 복잡한 단어가 아니다. ‘일일시호일’이란 말처럼 날마다 좋은 날로 보내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은 인생을 단순하게 산다. 이들은 불필요한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삶이 담백하다. 하나가 필요하면, 그 하나로서 만족할 줄 안다.
현대인은 일을 하며 하루 2/3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므로 일하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은 하루 대부분이 행복하다.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로 시작하는 사람이 그렇다. ‘팔로우 유어 블리스’라는 말처럼 자신의 천복을 좇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모두에 포함되어 있다. 그때 우리 흥분하고, 떠들썩하고, 짜릿했잖아. 이런 시작에서의 들뜸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는 단계가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 행복은 결과론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법정 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했다. 인간의 비교하는 마음 때문이다. 자신이 행복하다면 만족스러운 삶이다. 그런데 남과 견주게 되면, 우리는 불행해진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을 제대로 살 줄 아는 사람은 현재에 충만하다.
어느 산골에 왕이 나타나 그곳 선비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비는 “제가 바라는 것은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중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 지금 이 자체 외에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여기까지의 내용이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비중이 크다. 그래서 혹자는 스스로 정신 승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같은 상황을 놓고 다르게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행복 또한, 상대적인 것이며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 작가의 말로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을 제일 후수에 뒀다. 중간은 강남에 살고, 명예와 부가 있는 사람이다. 최고의 상태는 어쩌고, 저쩌고 했다. 예수님이 말하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라고 했다. 자기 마음을 단속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행복은 정신 승리가 아니다. 심리치료를 꽤 오랫동안 받아온 나는 마음에 관심이 많다. 그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 왕자를 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이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다.”
또한, 예수님과 니체도 언급한 어린이를 중요시하지도 않는다. 어린이는 성스러운 긍정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놀이할 줄 안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 책에도 나오지만, 그는 어떤 사람의 책이 완벽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린이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결론은 간단하다. 행복은 모두를 포용하고, 모든 상태에 있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행복하게 살려고’라고 답한다. 많은 사람을 대변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나는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 행복이란 망아의 경지에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일을 그 자체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