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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 — 익어가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전환들

2025년 대서(7월 22일) 도봉산에서

by 법의 풍경

7월 22일은 24 절기 중 대서였다.

태양이 가장 뜨겁고,

땅이 가장 오래 숨을 들이마시는 날.

나는 그 한가운데 도봉산을 올랐다.

그러나 그 여정은 더위보다도

절묘한 시간의 리듬과 생명들의 교차에 더 마음을 빼앗겼다.


1. 알밤 — 계절의 첨병

산길 초입,

여전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땅에 떨어진 조그만 알밤송이었다.

하늘에선 아직 여름이 펄펄 끓고 있는데,

밤송이는 벌써 익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전령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2. 귀뚜라미 — 바닥에서 일어나는 전투

사방에서 귀뚜라미들이 튀어 올랐다.

풀숲, 바위틈, 등산화 옆에서까지

날렵하게 움직이는 작은 생명들.

어제 중랑천변에 잠자리들이 집단 출현했다면,

도봉산에는 귀뚜라미들이 집단 출현했다.

그 가운데 한 마리,

죽은 동족을 입에 물고

힘겹게 뛰어가는 귀뚜라미를 보았다.

생존인가, 청소인가, 동족포식인가.

어떤 이유든,

그건 살아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고요한 무게였다.


3. 노부부 — 여유

바위 위에 부부로 보이는 나이 든 커플이 앉아 있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서로를 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도봉산은 물이 많은 산이다.

물에 발을 담그고 담소를 나누기 좋은 명당이 도처에 널려있다.

멀리서 보면 빛의 산이요,

안에서 보면 물의 산이다.


4. 정상의 고양이 —

낮잠, 그리고 텔레파시

정상에서 만난 고양이는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근처 코앞까지 가도,

귀찮다는 듯 한번 흘낏 보더니,

다시 누워버렸다.

그리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응, DK 왔어?
나 좀 피곤해서 잘 테니까 방해하지 말고,
구경 잘하고 가~’

나도 냥이 옆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5. 눈부신 구름들 - 변화의 아름다움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면

눈부신 구름들은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빛나게 한다.

냥이 옆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나는 구름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지만

최고봉은

구름이 아닐까?


6. 구부러진 소나무 — 빛을 향한 몸짓

정상 근처의 소나무는 하늘이 아니라

땅 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굴복이 아니라,

빛을 향한 선택.

굽어 자라는 건 생존의 유연함이었다.

때로는 땅을 길 줄도 아는 유연성,

이런 걸 Resilience라고 하던가?


7. 번개 맞은 나무 — 시작을 위한 죽음

하산길,

벼락에 쪼개진 나무가 서 있었다.

껍질은 벗겨졌고, 속은 비어 있었지만

그 나무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마치 인생의 깊은 상처조차도

시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존재처럼.


8. 흰 버섯 — 윤회의 흔적

옆에 더 오래된 죽은 나무의 몸통에는

줄지어 흰 버섯이 피어 있었다.

그건 부패가 아니라, 재생이었다.

죽은 것을 다시 생명으로 바꾸는

자연의 기술, 순환의 현장.

만약 나무에게 혼이 있다면

버섯으로 되살아나는 걸까?


9. 여왕개미 —

왕국을 짓기 전, 숨어드는 자

조용한 나무껍질 틈,

날개를 가진 여왕개미가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날개를 떨구고,

땅이나 죽은 나무속으로 숨을 것이다.

왕국의 탄생을 위해

그녀의 주위에는

수많은 일개미들이 줄지어 오르내리고 있었다.

왕국을 지으려는 여왕의 행진은 장엄했다.

나는 하나의 왕국이 시작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10. 하산길의 고양이 — 교감의 완성

그리고 마지막,

하산길에서 또 다른 고양이를 만났다.

다시 한번 다가갔고,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냥이가 머리가 가렵다며

눈빛으로 텔레파시를 보내며

머리를 내주었다.

나는 미용실에서 머리 감듯이

그녀의 머리를 시원하게 쓰다듬어줬다.

‘더 가려운데 있니?’

내가 도봉산에서 받은 기운이

그녀와의 접촉으로 갈무리되었다.


11. 시간차 공격:

하지에서 대서까지의 한 달


해가 가장 긴 날 ‘하지(夏至)’

날이 가장 더운 날 ‘대서(大暑)’

한 달의 시간차

하지에는 나비 떼가 날고,

개미들이 새로운 집을 지었는데

대서에는 잠자리 떼가 뜨고, 귀뚜라미 떼가 뛰고,

여왕개미가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하다.

어떻게 자연은 이런 정확한 시계를 갖게 된 걸까?

하나님의 설계는 정밀하다.


12. 인생의 계절


겉보기에 가장 성공한 순간에 느껴지는 내면의 허무함

겉보기에 가장 초라한 순간에 솟아나는 내면의 희망

이것이 양속에 음이 있고, 음속에 양이 있다는

바로 그 음양의 조화인가?


대서라는 절기를 지나며,

나는 이 모든 장면들이

단지 산속의 관찰이 아니라,

내 안의 리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 것.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도

모두 제때 도착할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쿵’이 오면 ‘짝’도 온다.

한 박자 쉬고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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