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신문기사와 뉴무라바에서의 점심 이야기
오늘 법률신문 기사를 보고 피꺼솟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뉴무라바 콘퍼런스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변호사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최근 행정소송에서 수십 개의 주장과 증거를 제출했는데, 판결문이 고작 10쪽 내외였고, 주장사항은 아예 판단도 하지 않았다면서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에서 더 이상 송무는 못하겠어요. 이런 후진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게 창피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짜 절망이 묻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법률신문 기사에서 이런 주장을 봤습니다
"서울·KCAB, 국제무대 존재감 전무"
왜 한국은 중재지로 선택받지 못할까요?
그리고 마치 이것이 KCAB 잘못인 것처럼 잘못 읽힐 여지가 있었습니다.
기호학적으로 보면...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문제는 기표(記表)와 기의(記意)가 서로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중재지'라는 기표가 사람들 머릿속에서 '중재가 열리는 장소'라는 완전히 다른 기의와 연결되어 버립니다.
이건 단순한 용어 혼동이 아닙니다. 개념을 정의할 때 사용한 은유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박의 선적국'을 '배가 지금 항해하고 있는 바다'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파나마 선적 선박이 부산항에 있다고 해서 한국 선박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중재지가 뭐지?
사실 많은 분들이 중재지를 '중재가 열리는 장소'라고 생각하시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삼성전자의 법적 본사는 경기도 수원에 있지만, 실제 주요 업무는 서울 강남의 삼성타워에서 이루어지죠.
마찬가지로 런던 중재원에서 "중재지는 한국"이라고 정하고 실제 중재 절차는 런던에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중재지는 '법적 본사'와 같은 개념이고, 실제 중재가 열리는 곳은 '업무 장소'와 같은 개념입니다.
그럼 중재지는 뭘까요?
바로 "이 중재에 어느 나라 법을 적용할 것이냐"를 정하는 겁니다. 중재 판정이 잘못됐을 때 어느 나라 법원이 이를 취소할 수 있는지, 어느 나라 법에 따라 집행할지를 결정하는 거죠.
싱가포르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이야기 하나 더. 제가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
투자 관련 국제중재에서 관할권 문제가 생겨서 싱가포르 법원에 갔습니다. 1심, 항소심 판결문을 받아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디테일함이 거의 중재 판정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찾아보니 답은 간단했습니다.
싱가포르 판사들의 비밀
- 연봉: 글로벌 로펌 최상급 어쏘 (우리나라의 5대 로펌 파트너 직전 연봉이 3억쯤 되려나?)
- 시간: 충분한 사건 심리 시간 보장
- 시스템: Common Law로 상세한 판단 제공
여기서 핵심은 영어로 사건을 진행하는 재판부입니다. 국제중재 사건은 대부분 영어로 진행됩니다. 계약서도 영어, 증거도 영어, 중재 판정문도 영어인데, 이걸 한국 법원에서 한국어로 다시 심판해야 한다면? 당신이 당사자라면 중재지를 한국으로 선택하겠습니까?
교수님이 수업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모든 교재와 자료가 영어인데, 한국어로만 강의해야 한다면? 번역 과정에서 뉘앙스도 사라지고, 미묘한 법적 논리도 왜곡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영어가 공용어입니다.
연봉 문제. 우리나라 판사 연봉으로는 국제 수준의 법관을 유치할 수 없습니다. 능력 있는 변호사들이 왜 사법부로 가겠습니까? 지난 서부지법 사태로 명예도 땅에 떨어졌고. 싱가포르는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최고의 연봉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사법부로 향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뉴무라바에서 만난 변호사 말처럼 "변론의 전취지"만 나오는 5쪽 판결문이 현실입니다.
진짜 문제를 찾아보자
문제의 진짜 원인을 하나씩 되짚어봅시다.
1단계: 한국이 중재지로 선택받지 못하는 본질 찾기
본질: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 부족
2단계: 연결고리 찾기
낮은 처우-인재 유출-품질 저하-
신뢰도 추락-중재지 기피
이게 바로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3단계: 해결의 실마리
문제를 정확히 진단했으니 이제 해법은?
상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시나리오: 송도 국제중재 허브
송도국제도시에 국제중재 특별구역을 만들어 봅시다:
- 이미 조성된 국제도시 인프라 활용
- 인천공항과의 접근성 (30분 거리)
- 영어 사용 환경이 어느 정도 갖춰진 곳
- 글로벌 수준 처우의 국제 판사단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봅시다
뉴무라바 콘퍼런스 점심시간에 들은 변호사의 하소연이 단순한 개인의 불만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 사법 시스템 전체의 신호등이 빨간불을 켜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한국이 국제중재 허브가 되려면 가장 시급한 게 뭘까요?
A) 국제재판부 설치 (영어로 재판하는 법원)
B) 판사 처우 개선 (한국 5대 로펌 파트너 직전 어쏘 변호사 수준으로)
C) 중재 관련 법령 정비
D) 완전히 새로운 접근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댓글로!)
한 가지 더 궁금한 것
여러분이 국제 분쟁 당사자라면, 어떤 나라를 중재지로 선택하시겠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무리: 작은 변화의 시작
김영하가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말했듯이,
모든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뉴무라바 변호사의 하소연을 그냥 개인적 불만으로 치부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 개선의 신호로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 사법부가 정말 국제적 신뢰를 받을 만한 수준인지 한번 솔직하게 돌아봅시다.
진짜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될테니까요.
P.S. 뉴무라바 그 변호사분,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요? 감정에 휘둘려서 글을 쓰면 안 되는데.. 오늘은 거룩한 분노라 휘둘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