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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Aug 21. 2020

1988년, 잠실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실은 장위동에서 건너편의 운치있는 일본식 양옥집을 사고 싶었다. 일본식 양옥집은 마당이 넓은 대신 집안 내부가 작은 편이라 대식구가 살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해 포기해야 했다. 시부모님과 아직 시집 장가를 가지 않은 막내 고모와 시동생까지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에 방이 다섯 개나 필요했다. 게다가 종갓집 장손이라 한 달에 한번 꼴로 제사를 지내야 했고,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40명 가까이 되는 친척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거실에는 어르신들 식사를 위해 커다란 상을 세 개를 붙이고 큰 방에는 아이들을 위해 또 상을 두 개는 붙여야 했다. 경주에서 올라오시는 작은 시아버님 식구들은 10명이나 되었는데, 한번 오시면 며칠 동안 머물다 가셨다. 큰 방에 있던 커다란 다락에는 이불과 요, 제사 그릇, 상들로 가득 찼다.  


결국 일본식 양옥집은 포기했지만, 아직도 파아란 잔디가 깔려 있던 마당이며, 아기자기한 집안 내부구조가 눈에 선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들어서면, 거실에서 반층 아래에 부엌이 있었고, 반층 위로 방들이 있는 현대적인 구조였다. 반층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작은 식당과 입식부엌이 모두 일본 잡지에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온 일본식 양옥집은 마침 나이도 비슷해 금세 친해졌다. 남편이 동아일보사에 다녀 동아일보사 마누라라고 불렀다. 시부모님 아침상 설거지를 후다닥 치우고 늘 그 집으로 커피를 마시러 갔다. 커피를 마시러 갈 때마다 일본식 양옥집을 사지 않은 걸 후회했다. 10년쯤 뒤 그녀가 신도시 과천으로 이사 갈 무렵, 동아일보사 마누라도 잠실로 이사를 갔다. 일본식 양옥집은 그녀의 집보다 방 수는 적었지만, 훨씬 비싸게 팔렸다. 1980년대는 이미 주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어떤 주택을 소유하는 지가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었다.


동아일보사 마누라가 이사 간 잠실의 주공아파트는 정부가 1970년대 초반 전 세계를 휩쓴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불황을 타계하고자 서둘러 추진한 아파트 공급계획에 따라 조성된 곳이었다. 정부는 도로와 철도 공사 및 아파트 공급 등과 같은 건설경기 활성화를 통해서 일자리와 소비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1973년 중동전쟁 반발 이후, 국제유가 급등으로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쳤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이 1974년 무려 24.8%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특히,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바뀌는 시기였기 때문에 유가파동의 여파는 컸다. 경제성장률은 1973년 12.3%에서 1974년 7.4%, 1975년에는 6.5%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경제는 1976년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잠실의 주공아파트도 반포나 과천과 마찬가지로 대한 주택공사가 건설한 단지였다. 대한 주택공사는 서울시가 잠실 인근 한강변에 매립한 토지의 일부(41만 평)를 매입해 1975년 3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5개의 단지를 조성했다. 총 364동, 1만 9,180가구가 수용되는 거대한 주택단지였다. 1단지부터 4단지는 단지의 중앙에 놀이터와 공원을 배치하고 아파트 건물들이 중앙을 향해 모여있도록 설계하였다. 5단지는 15층의 고층아파트로 한강변을 따라 나란히 아파트 건물들을 배치했다. 사람들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다양한 평형을 선택할 수 있도록 10개가 넘는 주택형으로 설계했다. '대한주택공사 30년 사'의 기록에 따르면, 가구당 월소득 4만 4천 원인 경우, 전용면적 8평 미만, 5만 8천 원인 경우, 10평 미만, 7만 3백 원인 경우, 14평으로 책정하였다. 잠실 주공아파트 단지는 뉴타운 개념을 도입하여 단지 내부에 행정기관, 병원, 학교, 체육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도록 계획했다.


그림 1. 잠실 주공아파트의 다양한 주택형 평면도

출처: 대한주택공사


동아일보사 마누라는 잠실의 주공아파트에서 몇 년을 살다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일반인에게 분양된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들만 둘이었던 동아일보사 마누라는 좀 무리를 해서 50평이 넘는 꽤 큰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전화를 했다. 유난히 덩치가 큰 두 아들 덕에 평수가 커도 집이 하나도 크게 보이질 않는다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복층이라 서로 마주칠 일이 적어서 좋다고 했다. 웬일로 짠돌이 남편이 가죽소파를 다 사주었다며 집 구경을 오라고 했다. 마침 그녀도 곧 고등학생이 될 두 딸들 때문에 이사를 생각하고 있던 터라 모처럼 잠실로 나들이를 갔다.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과 기자들에게 숙박할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와 함께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설계안에 따라 개발된 단지였다. 아파트 단지의 중심부에는 저층이 자리 잡고 외곽으로 나갈수록 층이 높아지도록 설계되어 일정한 스카이 라인이 형성되었다. 세대별로 채광을 높이고 사생활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지하주차장과 1층 세대들을 위한 앞마당이 조성되어 있었다. 과천의 쾌적한 주거환경에 제법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의 세련된 단지환경에 그녀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한강물을 이용한 하천이 단지 내부에 흐르고 있었고, 하천을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단지 앞에는 과천의 중앙공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의 올림픽공원이 있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대한주택공사에 대한 맹신과 민간 건설업자에 대한 불신이 싹 사라졌다.


                     그림 2. 올림픽 공원

                    출처: 국민체육진흥공단


50평이 넘는 동아일보사 마누라 집을 다녀오고 나니 과천 27평 아파트가 유난히 더 작게 느껴졌다. 며칠이 지나도 외국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 집이 눈에 아른거렸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던 일층과 이층을 이어주는 계단, 그녀의 거실만큼이나 큰 부엌, 거실 창을 통해 보이던 탁 트인 전망... 짠돌이 남편이 사주었다는 가죽소파가 유난히 더 반들거렸다. 이사를 가야겠다고 남편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치던 참에 정부가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의 5대 신도시를 만들어 1992년까지 200만 가구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광화문을 중심으로 반경 20km 안팎의 지역에 총 28만 2천여 가구(당시 서울 전체 주택 수의 20%)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


만성적인 서울의 주택부족 문제와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정부는 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1960년대 이후 서울에서 건설되는 주택수는 매해 꾸준히 증가하여, 1960년대에는 3만 호, 1970년대에는 3-5만 호, 1980년대에 들어서는 5-7만 호를 매년 건설했다. 1986년에는 한 해동안 12만 호가 넘는 주택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파르게 증가하는 가구수를 주택수가 따라가지 못했다.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6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림 3. 서울시 주택보급률

 출처: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1980년대는 저금리, 저물가, 원화 약세의 이른바 '3저 호황'과 함께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게임 등으로 인한 개발사업이 진행되어 주택 가격이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전국의 주택 가격이 평균 67% 상승하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년 동안 평균 아파트 가격이 2.6배나 상승하였다. 서울의 집값은 신도시 입주가 시작된 1991년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후, 정부는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할 때 마다 긴급 부동산 대책의 일환으로 수도권 지역의 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림 4. 서울시 주택가격지수

출처: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주 1. 단위: 2000년 기준지수= 100, 매년 12월 기준



참고문헌


대한주택공사30년 사(1992) 대한주택공사.

박철수 (2006) 아파트의 문화사, 살림.


주 1) 2005년 이전까지 주택보급률은 보통 가구수(일반가구수에서 5인 이하 비혈연가구와 1인 가구를 제외한 가구수)에 대한 주택수의 비율로 산정하였다. 기존의 주택보급률에 사용된 주택수는 소유권 단위를 기준으로 호수를 계산하여 다가구주택의 경우 1호로 반영하였다. 2005년 이후에는 일반가구수(보통 가구수+5인 이하 비혈연가구+1인 가구)에 대한 주택수의 비율을 주택보급률로 산정하고 있으며, 다가구주택의 구분거처 호수를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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