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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Aug 02. 2020

1984년, 드디어 아파트

1984년 남편을 따라 신도시 과천으로 이사를 했다. 과천은 1970년대 후반, 서울의 인구집중을 완화시키기 위해 조성된 1세대 계획도시다. 정부 제2종합청사를 건설해 서울의 행정부 기능 일부를 외곽으로 분산시킨다는 목표에 따라 건설되었다. 대한주택공사는 저층 아파트 9개 단지와 고층 아파트 3개 단지, 단독주택지 3개 지구, 1개의 상업지구로 나누어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총 13,522호의 아파트를 건설하였다.


   그림 1. 과천 정부 제2종합청사 전경(1980)

  출처: 국토교통부


역시 '신'도시는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으로 들어설 때면 관악산을 배경으로 한 적벽돌 성당의 모습과 곧게 뻗은 가로수길은 흡사 외국의 도시를 연상케 했다. 계획도시답게 깔끔하게 정비된 도시의 중앙에는 큰 규모의 공원과 공립도서관이 있었다. 아파트 동 앞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쉼터가 있었고, 도보로 5분 거리에 초등학교와 상가가 있었다. 시부모님을 위한 노인정도 상가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장위동에서 누려보지 못했던 생활 인프라였다.


장위동 집은 지대가 높아 여름엔 시원했지만, 겨울이면 가파른 언덕길에 눈이 쌓여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시아버님은 행여 집안의 장손인 남편이 출퇴근 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다 태운 연탄재를 새벽부터 뿌려놓으셨다. 사립학교 추첨에 떨어진 후, 좀 나은 공립학교를 보낼 욕심에 딸 둘은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없는 거 없이 다 있던 미아시장은 비가 오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질퍽한 바닥에 물 웅덩이까지 생겨 신발이 다 젖었다.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언덕길을 오르는 것도 힘에 부쳤었다. 시장 구석에서 수다를 떨던 동창들도 하나 둘 강남으로 이사를 가버려 장 보러 가는 재미가 예전만 못했다.


그 무렵 남편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직장이 이전을 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서울의 동쪽 끝인 장위동에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과천은 오고 가는데만 4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산 넘고 강 건너였다. 남편은 자정이 다되어서야 초주검이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파트는 사람 살 곳이 아니라며 질색팔색을 하시던 시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셨다. 함께 살 던 시동생들도 모두 출가를 해 큰 주택이 더 이상 필요 없던 차였다.


다행히 장위동 집값은 지난 8년 동안 꾸준히 올라 3,000만 원 정도에 매매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트에 살기를 꺼려했고 경기도라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과천의 아파트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방이 세 개인 27평형 아파트를 2,500만 원 정도에 매입했다. 딸 둘은 아직 어려서 방을 같이 써도 됐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조금 욕심을 내 더 큰 평형의 아파트를 사고 싶었지만, 남편은 더 이상 은행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녀가 사고 싶었던 고층의 38평형 아파트는 3,200만 원 정도였기 때문에 또다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했다.


시부모님은 고층 아파트는 더더욱 싫다고 하셨다. 안 그래도 공중에 붕붕 떠 있는 느낌인데 엘리베이터까지 타야 한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38평형도 방은 세 개뿐이었기 때문에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장위동 집을 사면서 대출받은 돈을 다 갚고도 여유돈이 생겼다. 말로만 듣던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다.


청계산과 관악산으로 둘러싸인 과천은 전체 면적의 85% 이상이 개발제한구역이어서 자연환경이 무척 좋았다. 하천에 물고기 떼가 노는 것도 보였다. 등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매일 아침 청계산 약수터에 가서 물을 떠 왔다. 주말이면 관악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곤 했다. 서울과 공기부터 다른 것 같았다.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주거환경이 좋은 탓이었는지, 외국인들도 꽤 많이 거주했었다. 간혹 길에서 이들과 마주치는 일도 일상의 소소한 재미였다.


과천으로 이사 온 사람들도 대부분 그녀처럼 아파트 생활이 처음이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왔기 때문에 사는 게 다 비슷비슷했다. 아주 잘 사는 사람도, 아주 못 사는 사람도 없었다. 우려했던 것처럼 아파트 생활은 삭막하지 않았다. 모두들 낯선 도시에 아파트라는 익숙지 않은 공간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장위동에서 처럼 이웃들과 친하게 지냈다. 낮에는 문도 잠그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4층에 있었는데, 시아버님은 아파트 호수를 확인하지 않으시고 3층 집 문을 불쑥불쑥 열곤 하셨다. 그래도 3층 여자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장위동 집에 비해 규모도 작고 마당도 없었지만, 처음 살아 본 아파트는 모든 게 편리했다. 시부모님은 여전히 못마땅해하시는 눈치였지만, 현대식 욕실과 부엌, 중앙난방 시스템으로 겨울은 언제나 따뜻했다. 긴 겨울 연탄불을 갈려고 자다 말고 시린 새벽에 달려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겨울마다 100포기나 되는 김장김치를 담글 필요도 없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딸내미 만한 항아리도 더 이상 씻지 않아도 됐다. 장위동을 떠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리고 왔는지 모른다. 시어머님 잔소리가 귀에 따가웠지만, 그녀는 속이 다 후련했다. 수도꼭지를 틀면 늘 더운물이 나왔다. 게다가 아파트 내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관리실에 전화만 하면 됐다.


반포로 이사 간 순자가 왜 그렇게 아파트 노래를 불렀는지 이해가 갔다. 현대식 부엌에 걸맞게 새로 장만한 식탁에서 마시는 커피는 유난히 달콤했다. 아파트는 주부에게 천국이었다. 다시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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