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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Aug 01. 2020

1976년, 셋방살이 탈출  

1970년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가을의 마지막 날 6남매 맏이와 시민회관에서 결혼했다. 난생처음 붙여 본 속눈썹은 제일 앞줄, 한복을 곱게 입고 앉아 있는 친정엄마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울컥함이 밀려와 흐르는 눈물로 절반이 다 떨어져 나갔다.


광복 이후 1961년 개관한 시민회관은 시민들이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문화 예술 공연장소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 1968년 6월 내한한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의 공연을 남편과 보기 위해 몇 달치 봉급을 아끼고 모았다. 아시아에 샹송 붐을 주도한 이베트 지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자주 공연을 했다. 음악다방에서 친구와 커피를 홀짝이며 듣던 샹송을 직접 듣고 싶어 시큰둥해하는 남편 손을 잡아끌고 갔다. 


               그림 1. 이베트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해 1963년 발표한 음반 재킷

                출처: 서울신문(2007년 2월 8일)


연애시절 추억의 장소가 1972년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6년 뒤, 3,800석 이상의 대극장과 532석의 소극장을 갖춘 최대 규모의 종합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이 개관되었지만, 그녀는 시민회관이 그리웠다. 아니, 시민회관에서 보낸 그녀의 푸르른 청춘이 그리웠다. 딸들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으로 공연을 보러 올 때마다 화재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결혼식 장소, 시민회관에서의 추억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림 2. 서울시민회관 전경

                    출처: 백과사진첩


시부모님과 시동생들까지 모시고 셋방살이로 성북구 장위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의 동창들도 근처에 살아서 미아시장에서 곧잘 마주치곤 했다. 동창들과 마주칠 때면 시장 구석에 서서 어떻게 하면 집을 마련할까 한참을 떠들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그때는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시부모와 시동생들 뒷바라지로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남편의 안정적인 직장과 공부를 잘 마치고 취직한 착한 시동생들 덕분에 셋방살이 6년 만에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은행에서 약 800만 원을 대출받아 2천3백5십만 원에 매입하였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숫자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마련한 집이었다. 그 집으로 이사 오던 날은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다.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집집마다 빨간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랫동네에 세 들어 살면서 늘 동경하던 그 윗동네로 이사 온 것이다. 이 골목길을 얼마나 다녔는가 말이다. 집이 나왔다는 말만 들으면 복덕방 아저씨를 앞세워 수도 없이 보러 다녔다. 커다란 철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을 따라 들어가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는 연탄을 100장도 넘게 보관할 수 있는 넉넉한 창고가 있었다. 창고 앞의 수돗가를 지나 걸어 들어가면 부엌으로 연결되었다. 윗동네라 전망도 좋았다. 장위동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집주인 눈치 보지 않고 큰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고, 부엌에서 냄새나는 음식도 해 먹을 수 있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다 참고 마련한 집이었다. 시동생들은 돈을 모아 시부모님 방에 TV를 놓아 드렸다. 시아버님은 전기세가 아까워 저녁 뉴스만 보셨다. 드라마가 보고 싶었던 시어머님은 늘 불만이셨지만, 벌써 노인정에 가셔서 TV 자랑을 실컷 하신 모양이셨다. 시아버님이 안 계신 날이면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거실에는 현대식 소파와 페르시안 카펫도 깔아 놓았다. 커피 테이블 위에 전화기도 놓았다. TV 드라마에서만 보던 '응접세트'를 마음껏 흉내 냈다. 그녀는 배실 배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거실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드디어 '집주인'이 된 것이다.


                        그림 3. 1970년대 흑백 TV

                    출처: 삼성전자


동창 중 순자 다음으로 그녀가 내집마련에 성공했다. 순자가 이사한 반포 주공 아파트의 현대적인 시설이 부럽기도 했지만, 대식구가 살기에 아파트는 너무 비좁았다. 시부모님은 위아래층에 다른 사람들이 사는 그런 '이상한' 구조의 아파트를 질색팔색 하셨다.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TV나 신문에서 아파트 단지 광고를 보실 때마다 혀를 끌끌 차셨다. 계절마다 꽃나무, 과일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이 취미셨던 시아버님은 마당이 없는 집에 산다는 건 상상도 못 하셨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독주택에 거주했다. 아파트 거주율은 겨우 5% 정도에 불과했다. 서울의 경우에도 총 주택수 대비 아파트 비율이 50%를 넘은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림 4. 시계열별 서울시 단독주택과 아파트 주거비율(1975-2010)

출처: 통계청

주 1) 주택을 대상으로 빈집 제외

주 2)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비거주용 건물 내 주택 제외


사람들의 아파트에 대한 편견은 1970년 부실공사로 무너진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때문에 더 심해졌다. 6.25 전쟁 이후 사람들은 서울로 밀려들었다. 주택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사람들은 무허가 판잣집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김현옥은 무허가 판잣집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였다. 13만 7000 여동이 집계되었는데, 김현옥은 4만 7000 여동은 리모델링을 통해 양성화하고 나머지 9만 동은 서울의 시민아파트와 경기도 광주군(현재 경기도 성남시)에 대단지를 조성하여 이주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68년 서울시는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60년대 말 서울의 판잣집은 기어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도심·외곽 할 것 없이 들어찬 판자촌은 한 마디로 서울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으니까요. 내 발상은 간단했습니다. 쓰러질 듯 누워 있는 판잣집을 번듯하게 일으켜 세우자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아파트지요. 당시에는 서대문 금화지구 7만 채를 포함, 서울시 1백만 평 땅에 14만 5 천재의 판잣집이 널려 있었습니다.

                                                                    — 김현옥, 1994년경 월간중앙 허의도와의 인터뷰


마포 와우아파트의 건설업자는 부족한 사업자금에 뇌물까지 써가며 건설 허가를 따냈기 때문에 아파트 공사는 부실공사로 이어졌다. 결국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아파트 한동이 무너져 사망 33명, 부상 38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가파른 와우산 중턱에 지어졌기 때문에 아파트 아래에 있던 판잣집까지 덮쳐 추가로 판잣집에서 자고 있던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현옥은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관련자들은 구속되었다.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총 405동 중 349동이 안전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시민아파트 가운데 101동이 철거되었는데, 이 철거비용이 447동 건립비용에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림 5.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출처: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안타깝게도 부실공사의 관행은 고쳐지지 않고 이어졌다. 1990년대는 부실공사로 인한 대형참사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강남의 고급 백화점이었던 삼풍 백화점이 8월의 무더운 여름날 거짓말처럼 무너져 버렸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던 다리, 성수대교도 반토막이 나 버렸다. '빨리, 빨리'를 외치며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발전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어두운 현실이었다.



참고문헌

손정목 (2018)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1, 한울

강준만 (2002)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권, 인물과 사상사.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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