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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Jul 21. 2020

1970년, 강남 개발 그리고 빨간 바지 복부인

1970년 11월 5일 서울시는 "과밀화되어 가고 있는 구시가지의 인구를 한수 이남으로 분산하고 새 서울의 균형 발전을 위해 남서울 개발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급팽창하는 강북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정부는 강남 개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강북의 명문학교들을 강남으로 이전시켜 ‘강남 8 학군’을 조성하고, 법원과 검찰청 등과 같은 공공기관과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애초 강북 왕복 노선으로 계획되었던 지하철 2호선을 강남을 포함한 순환노선으로 변경하여 건설하였다. 


강남구는 정부의 남서울 개발계획에 따라 1975년 탄생되었다. 당시 강남구의 면적은 상당히 커서 오늘날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모두 포함했다. 이듬해인 1976년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1970년대 우리 사회는 비로소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먹고살만하게 되었고, 집다운 집에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팽배하였다.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주택건설 10개년 계획'(1972-1981), '국민주택건설촉진법'(1973) 등이 제정되었고 집합주택 단지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강북의 미아리와 수유리, 장위동에 모여 살던 그녀의 동창들도 하나둘씩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수유리 방 한 칸에서 셋방을 살던 그녀의 동창 순자는 1970년대 초반 '화곡동 10만 단지'의 단독주택으로 전세를 가더니 몇 년 지나지 않아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 셋째 아이를 임신한 데다가 집주인이 터무니없이 전세가를 올려달라고 해, 소문으로 듣던 반포주공 아파트를 찾아갔다.


반포주공 아파트는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건설한 최초의 주공아파트 단지였다. 총 99개 동으로 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평형도 22평부터 62평까지 매우 다양했다. 국내 최초로 복층 설계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난방시설도 설치한 최신형 아파트였다. 분양 당시 반포주공 아파트의 이름은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아파트라는 의미의 '남서울 아파트'였다. 분양 광고에는 서울의 사대문 안인 남대문과 서울시청에서 멀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림 1. 반포 주공 아파트 1단지 분양광고

            출처: 서울경제(2018년 7월 4일)


불편한 단독주택에만 살다가 처음 본 아파트의 현대식 시설과 깔끔한 단지에 반하여 순자는 22평 아파트를 400만 원가량에 계약을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가장 작은 평형이었지만, 70대 중반이 되어서도 계약하던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이 언론사에 다녔던 순자는 다른 동창들에 비하여 빨리 집 장만을 하여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


22평 아파트를 사고 난 이후에도 순자는 억척같이 돈을 모아 2년 만에 반포 주공 아파트 32평을 1,000만 원에 매입하여 이사하였다. 반포 주공아파트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살아서 교수 아파트로도 불리던 고급 아파트였다.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해를 거듭할수록 올랐다. 순자는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출국 준비를 하면서 1980년 반포 주공 아파트를 3,000만 원에 매매하였다. 3년 만에 3배가 오른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강남의 토지 가격은 1년 새에 10배 이상 뛰어오르기도 하였다. 1963년 1평(3.3m2) 당 4백원하던 강남의 토지 가격은 1970년 2만 원, 1975년 1십만 원, 그리고 1979년에는 4십만 원으로 폭등하였다. 16년 만에 토지 가격이 1천 배나 오른 것이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16년동안 강남구 학동의 지가는 1,333배, 압구정동은 875배, 신사동은 1,000배 올랐는데, 같은 기간 강북인 중구 신당동, 용산구 후암동은 각 25배 오르는 데 그쳤다(장상환, 2004).

 

그림 2. 강남지역의 지가상승(1963-79)

     출처: 강남구지, 1993

 

강남 일대의 토지는 집중적인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상류층 가정주부들도 강남 개발 열풍에 합류하였다. ‘투기를 위해 복덕방을 수시로 출입하는 상류층 부인’을 의미하는 복부인이라는 신조어가 언론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8년 특혜 분양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가 투기의 상징적인 대상이 되면서 복부인이라는 단어가 대중화되었다.


현대건설은 '50가구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는 공개 분양해야 한다'는 주택건설촉진법을 무시하고 정부 관리,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고위급 인사들에게 주변 집값의 50% 수준으로 특혜분양을 하였다. 현대아파트는 분양과 동시에 5,000만 원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당시 분양가가 1 평당(3.3m2) 44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30평 이상의 아파트 한채 가격에 해당하는 금액이 프리미엄으로 붙은 것이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아파트값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1번지다.


 그림 3. 1981년 12월 현대건설이 준공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출처: 경인일보(2018년 12월 1일)


이 무렵 임권택 감독은 사회고발 블랙 코미디 영화 '복부인'을 제작하여 광복절날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주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한혜숙이 맡았고, 서울에서만 15,761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영화는 생활비 문제로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던 주인공(한 여사)이 운 좋게 아파트 입주 청약에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오백만 원이라는 큰돈을 벌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복부인이 된 한 여사는 토지사기단과 함께 부동산 투기에 가담하여 거액의 재산을 모으게 되지만, 결국 사기단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경찰에 연행된다.


                                    그림 3. 임권택 감독의 영화, 복부인 포스터


영화 복부인의 결말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복부인은 빨간 바지를 입고 강남의 투기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복부인의 상징처럼 되었던 '빨간 바지'는 연희동의 '그녀' -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씨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마치 이들은 '어떤' 지역이 '언제' 개발될지를 미리 알고 있는 듯했다. 복부인들이 휩쓸고 간 지역은 어김없이 땅값이 올랐고 그녀들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챙겼다.


그녀의 동창 중 가장 빨리 강남에 진입한 순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순자는 복부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했지만, 신기하게 사는 아파트마다 가격이 올랐다. 1980년 반포 주공 아파트를 3,000만 원에 매매하고 난 뒤, 순자는 지인의 소개로 대치동에 미분양된 청실 아파트 43평 아파트를 3,600만 원에 매입하여 전세를 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까지도 강북의 장위동에 살던 그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대치동이라는 동네에 거금을 주고 아파트를 덜컥 사는 순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미국으로 떠나는 마당에 말이다. 순자는 반포 주공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강북에 있던 좋은 학교들이 대치동으로 이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년의 미국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세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학군을 고려하여 아파트를 매입했다고 설명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꼼이였던 순자는 학군과 주택 가격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미 '강남 엄마'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1. 장상환(2004) 해방 후 한국자본주의 발전과 부동산투기, 역사비평 봄호, 통권 66호, 55-78.

2. 전남일 외(2008) 한국 주거의 사회사, 돌베개

3. 손정목(2003)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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