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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Sep 06. 2020

1997년, 국가 부도 그리고 강남 아파트

그녀가 강남의 아파트를 매입하게 된 건 1990년대 말 국가 최대의 경제위기 때였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오르던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1990년대 초반 수도권 신도시 개발로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남의 낡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도 너도 나도 신도시의 깔끔한 새 아파트로 이주해갔다. 그리고 1998년 서울의 아파트 가격 상승률은 전년대비 -15%로, 그야말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국가가 부도사태에 이르렀으며,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의 지원 금융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경제회생을 위한 국민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대통령의 호소에 국민들은 진심으로 동참했다.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금을 자발적으로 내놓았다. 당시 외환 부채가 304억 달러에 달했는데, 351만 명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으로 21억 3천 달러의 가치에 달하는 227톤의 금이 모였다. 우리나라는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차입금(195억 달러)을 모두 상환했다.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그림 1.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는 시민들

출처: 중앙일보(2019년 9월 3일)
        

불과 1년 전, 1996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에 가입되었다며, 이제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기뻐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1997년 연초부터 한보사태로 온 나라가 뒤숭숭했었다. 한보사태는 정계와 재계 인사들의 부정과 비리로 인해 발생한 사상 최대의 권력형 금융부정사건으로 국가 부도의 촉발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씨도 사건에 연루되어, 대통령은 취임 4주년 대국민담화에서 "저를 더욱 괴롭고 민망하게 하는 것은 제 자식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박보균, 1997). 대통령 가까이에서 일했던 사람들 모두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문제가 국가 전체를 부도위기에 처하게 한 뼈아픈 사건이었다.


그녀도 두 딸들이 시집갈 때 주려고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돌반지와 남편이 상으로 받아 온 황금열쇠를 들고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도당체 이 나라가 어찌 되려나... 착잡한 심정으로 신반포에 사는 옥자를 만났다. 남편을 제외하고 그녀가 분당으로 이사 가는 걸 반대한 유일한 친구가 바로 옥자였다. 분당 시범단지 순자의 새 아파트를 보고 오는 길 내내 그녀는 분당으로 이사 갈 꿈에 부풀어 옥자에게 조잘거렸었다.


옥자는 일찍 혼자가 되었지만, 억척스럽게 일을 해서 반포에만 아파트를 3채 갖고 있었다. 옥수동과 잠실에도 작은 평수지만 아파트가 몇 채 더 있다고 했다. 현금도 꽤 많다는 소문이 동창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딸, 아들도 어찌나 잘 키웠는지 둘 다 명문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고 있었다.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옥자는 늘 이재에 밝았다. 그녀가 옥자를 다시 만난 건 아주 우연이었다. 10년 전쯤, 남편에게 새 와이셔츠를 장만해주려고 명동의 한 맞춤집에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동안 소식이 끊겼던 옥자가 그 맞춤집 사장님이었다. 남편의 와이셔츠는 안중에도 없었다. 옥자와 둘이 손을 맞잡고 지나온 세월을 울고 웃으며 나누었다. 참 모진 시간을 옥자는 혼자서 씩씩하게도 살아왔다. 이제 일하지 않고 셋돈만 받아도 될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도 놀면 뭐하냐고, 좀이 쑤셔 매장에 나와 앉아있는 거라고 했다. 노년에 돌봐줄 남편도 없으니 벌 수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며 까르르 웃었다. 갑자기 홀로 세 남매를 키우셨던 친정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이후, 옥자도 동창모임에 나왔다. 그녀는 다른 동창들에게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를 곧잘 옥자와 나누었다.


옥자는 분당이 제2의 강남이 될 거라는 순자와 달리 강남을 고집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신도시로 빠져나가 강남의 집값이 떨어질 때 아파트를 사라고 했다. 직장과 집은 무조건 가까워야 한다는, 직주근접을 원칙으로 삼고 있던 남편도 분당으로의 이사를 절대 반대했다. 결국 꿈의 신도시, 분당으로의 이주는 한 여름밤의 꿈으로만 그쳤고, 과천의 넓은 평수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모두들 이 엄청난 위기가 언제까지 갈지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옥자는 오히려 지금이 부동산 투자의 절대 기회라고 했다. 급매로 나온 아파트들이 수두룩하다며 자기가 거래하는 부동산 사장을 소개해주었다.

 

2018년 개봉된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위기는 반복됩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난파선에서 먼저 나가는 사람이 사는 거야"라는 금융인 윤정학(유아인 역)의 대사처럼 그녀는 과감하게 신반포에 낡은 아파트를 두 채나 매입했다. 윤정학은 당시 경제 관료들의 '무능력함'에 수십억 원을 배팅해 돈을 버는 인물로 나온다. 과천에서 전세를 주었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살고 있던 아파트는 전세를 주었다. 1998년 여름 드디어 강남에 입성했다. 효자 아파트의 전세가가 지속적으로 오른 덕분에 제법 목돈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국가경제위기로 1995년 8.8%였던 정기예금 금리가 1998년 13.3%로 올랐다. 마침 만기 된 적금도 높은 이자에 받게 되어 경제적인 여유가 충분했다.  


그림 2. 연도별 정기예금 금리 변화(명목금리)

출처: 한국은행


사람들은 이제 부동산은 끝났다고들 이야기했다.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집'과 '땅'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맹목적이고도 지나칠 정도의 '집'과 '땅'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은 쉽게 버려지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그녀 세대에게는 그랬다. 


그림 3.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모두가 주저하던 때에 그녀가 굳이 강남에 아파트를 두 채나 매입한 이유가 단순히 옥자의 권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산적 가치를 갖는 주택의 특성을 그녀는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1세대 계획도시인 과천에서의 거주 경험을 토대로 아무리 거주환경이 뛰어나도 좋은 학교와 병원, 쇼핑, 서비스 센터와 같은 편의시설과 대중교통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 주택을 매입하게 되면 자산적 가치가 오르는 데 제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동창들을 만날 때도, 명절을 포함한 각종 집안 행사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늘 서울 시내로 나와야 했다.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아이를 들쳐 엎고 서울의 큰 병원으로 허겁지겁 뛰어야 했다. 과천은 사당동에서 고개만 넘으면 되는데도, 급할 때 택시를 타고 서울을 나가기도, 들어오기도 어려웠다. 택시기사와 늘 할증 요금으로 실랑이를 해야 했고, 출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은 나날이 심해졌다. 그리고 학교가 뭐 대수냐 자기만 열심히 하면 되지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강남에 사는 친구들에 비해서 자신의 아이들이 점점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국가부도 위기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로 들어서자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특히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과천의 아파트 가격도 많이 올랐지만, 강남의 가격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수도권 신도시로 떠났던 ex-강남 거주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고 땅을 치며 후회했다.



참고문헌

강정현,  "[서소문 사진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되돌아보니", 중앙일보, 2019년 9월 3일

박보균, "한보사태 진심으로 사죄-김영삼 대통령 對국민담화", 중앙일보, 1997년 2월 26일

조문호, "'전 국민 달러 모으기', 애국인가 망국인가" 매일신문, 2008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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