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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Sep 01. 2020

1993년, 꿈의 신도시

주택 200만 호 건설은 '보통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선거공략이었다. 1980년대 후반, 서울시내 전체의 주택수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주택 양을 5년 내에 공급한다는 실로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 유난히 주택문제에 집착한 그는, "박정희는 1970년대 도로를 뚫은 길 대통령이라면 나(노태우)는 주택을 짓는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2007).


민주화 항쟁이 거세게 일었던 1980년대, 서민들의 주거문제는 '복지와 형평'을 내세웠던 노태우 정부, 제6 공화국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연평균 10.5%로 꽤 안정적이었던 지가 상승률이 1988년 제6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27.5%로 올랐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32.0%로 치솟았다. 집값 역시 폭등했다. 1988년 13.2%, 1989년 14.6%, 1990년 21%로 집권 3년 만에 56%가 올랐다. 전셋값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와중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평당 가격이 1000만 원을 넘었다. 주택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정부는 수도권에 90만 호, 지방도시에 나머지 110만 호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에 40만 호, 분당, 평촌, 일산, 산본, 중동의 5개 신도시에 30만 호를 짓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서민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25만 호도 공급하겠다고 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신군부 출신답게 신도시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9년 4월 27일 5대 신도시 계획이 발표된 지 7개월 만에 분당 시범단지(4030가구)가 분양되었다. 2년 뒤, 분당의 첫 입주가 시작됐고, 92년부터 나머지 신도시에도 입주가 줄줄이 이어졌다. 연평균 10% 이상의 높은 인구성장률을 기록하던 서울의 인구가 1990년에서 1995년 사이에 -3.6%로 처음으로 감소했다. 서울의 인구는 1990년 1,060만 명에서 1,022만 명으로 줄어든 이후 점점 감소하였고, 수도권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림 1.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증가율(1949-2010)

출처: 국가통계포털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은 당초 계획보다 1년 이상 앞당겨져 완성되었다. 공식적인 주택수는 214만 호로 4년여 만에 우리나라 총주택(1989년 기준 645만 호)의 33%가 지어졌다. 정부의 노력에 부응이라도 하듯 주택 가격도 1991년을 기점으로 처음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주택 가격 상승률이 -2.1%로 나타났고, 서울은 -0.5%였다.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때까지 주택 가격은 계속 안정되었다. 주택보급률도 1991년 74.2%에서 1997년 92%로 꾸준히 상승했다. 물론 주택공급의 확대가 이례적인 주택 가격의 안정을 가져왔지만, 정부는 토지공개념 3 법(택지소유 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등과 같은 강력한 투기억제정책을 동시에 시행하였다. 


그림 2. 서울시 주택건설실적 추이(1965-2005)

출처: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그림 3. 서울시 주택매매 가격지수 및 전세 가격지수


                                                                                            (단위: 2011년 6월=기준지수 100)

출처: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빨리, 빨리'를 외치는 부실공사의 관행은 불행히도 신도시 개발에도 이어졌다. 신도시 부실공사 파문은 끊이질 않았다. 아파트 옥탑부터 지하주차장까지 붕괴 사고소식이 신문과 뉴스에서 연일 보도됐다. 1991년 6월, 분당 시범단지 아파트 옥탑이 붕괴됐다. 불과 입주를 5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콘크리트 작업원들이 옥탑 지분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어 넣던 중 거푸집을 바치고 있던 지대가 무너져 내리면서 옥탑 전체가 붕괴되어 버렸다. 분당 지하주차장 공사장에서도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신도시 아파트가 날림으로 건설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쑤근거렸다. 5개 신도시 개발이 동시에 이루어져 자재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불량 철근과 중국산 저질 시멘트, 여기에 바닷모래까지 사용해 신도시 아파트는 '소금 아파트'로 불렸다. 주민들은 집값 때문에 말도 못 하고 속앓이만 해야 했다.


그림 2. 신도시 부실공사 관련 신문기사 (중앙일보, 1994년 11월 28일)

출처: 중앙일보 조인스랜드(2015년 7월 4일)


신도시로 이사 갈 꿈에 부풀어 있던 그녀는 뉴스와 신문을 펼칠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두 딸들의 입시가 끝나자마자 신도시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갈 계획이었다.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가 떠올라 도저히 이사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다 말고 천장이 무너져 네 식구 참사'의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닌가 별별 상상을 다 하던 중 동창모임에 나갔다. 발 빠른 강남 엄마 순자는 이미 분당으로 이사를 했노라고 이야기했다. 서현동 시범아파트 단지라고 했다. 안 그래도 다들 궁금해하던 차에 너도 나도 달려들어 순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결국 다음 달 동창모임은 순자네서 하기로 했다.


동창모임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순자에게 부리나케 전화를 했다. 물론 신도시 부실공사에 대해 말들이 많았지만, 둘째 딸아이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분당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순자도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분당이 '제2의 강남'이 될 거라고 했다. 분당의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 전에 얼른 먼저 이사를 오라고 했다. 이미 반포와 대치동에서 꽤 괜찮은 시세차익을 남겼던 순자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신문에서도 분당을 '꿈의 신도시(동아일보, 1992년 10월 26일)' 혹은 '제2의 강남(경향신문, 1992년 4월 29일)'으로 표현했다. 흥미로운 건 경기도 성남시에 속한 분당구가 아니라 '분. 당'이라는, 성남시와 구별되는, 새로운 도시공간으로서의 이미지를 주고 있었다.  


분당 중앙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순자의 새 아파트는 모든 것이 좋았다. 30층이나 되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아파트는 올려다 보기에도 목이 아팠다. 28층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마치 남산 서울타워 전망대에 올라서 보는 것 같았다. 동아일보사 마누라가 살고 있던 잠실 올림픽 아파트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듯 했다.  


그림 3. 분당 중앙공원

출처: 위키백과


시범단지안에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어서 학생들은 도보로 통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순자의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는 서울에서 볼 수 없는, 대규모의 쇼핑 거리가 반듯반듯하게 조성되고 있었다. 대형 백화점이 몇 개나 들어올 거라고 했다. 단지 앞 버스정류장에서는 강남까지 한 번에 올 수 있는 직행버스가 수시로 있었고, 도보로 5분 거리에 지하철역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에서 진입하기에도 매우 편리했다. 신반포에 살고 있던 옥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15분 정도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자 성남방향 진출로 사인이 보였다. 시부모님 산소를 경기도 광주에 모셨기 때문에 남편과 성남 근처를 꽤 자주 다녔지만, 막상 분당으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경부 고속도로 진출로에서 나오자마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위압감 있게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 분당은 강남 그 이상이었다.





참고문헌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2007)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한스미디어

이영재(2019) 일산 신도시의 비애. <비즈앰>. 2019년 6월 13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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