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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메 Dec 09. 2016

다 그만두고 싶어지다가도

푸른 하늘, 구름 비단을 두른 반달님

08 Nov. 2016

@Grenoble, France


이번 학기 또 하나의 프레젠테이션을 오늘 마쳤다. 


발언을 잘 안 하는 날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교수님의 수업이라 이미 시작부터 한숨만 푹 쉬었었지만, 그건 발표를 마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난 무슨 생각으로 정치를 배워보겠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이든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얘기는 옛날부터 들어왔지만, 막상 그 책임, 부담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지금, 자존심이 아주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있다. 


정치 경제 분야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이후 미래도 전공을 살려 국제기관이나 NGO에 들어가는 게 목표인 친구들이 대부분인 그런 이 공간에서 나 같은 정치 입문자는 정말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내가 발표하는 내내 느껴지는 시선이 그랬고, 안 그래도 볼품없는 내 발표 내용물이 더 볼품없게 느껴졌다. 


교수님은 딱히 내 발표에 대해서는 코멘트가 없으셨지만, 그게 은근 더 서럽기도 했다. 같은 조원 친구에겐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관심을 보였기에. 


내가 이 학교에 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일본에서 정치라고는 교양으로 살짝 접해본 게 다였던 나는 순전히 프랑스 교환 협정교 중에 '시앙스포'라는 이름이 멋있어서, 라는 이유로 이 곳에 오길 택했었다. 하지만 이 곳은 그저 그런 단순한 호기심과 동경심으로만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걸 오늘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왕 정치를 배우게 된 거 열심히 해보라는 핀잔도 자주 듣지만, 교양으로 살짝 정치를 '맛보기'했을 때와 진짜로 정치'만' 배우는 거랑은 확연히 다르다.. 내게 정치는 어려운 학문이다. 현재 유럽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시사문제들을 다룬다 해도 이미 기본 지식이 친구들과 너무나 차이가 극명하게 나기도 하고 내 언어 실력으로는 리서치해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공부할 맛은 안 나고, 이러려고 이태껏 영어고 프랑스어고 대학을 다니며 공부해온 건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수업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차올랐다. 

나 자신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취미만 하나 둘 늘고 정작 공부는 진전이 보이지도 않고. 

여태껏 뭘 해온 걸까. 


그렇게 나 자신을 구박하며 한숨 쉬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내 시선은 한 곳에 꽂혔다. 오후 4시 20분, 곧 날이 저물기 시작할 즈음이긴 했지만 아직은 밝고 푸르렀던 하늘 가운데에 조심스레, 하지만 확고한 존재감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반달. 그가 두른 비단 같은 옅은 구름은 그런 그의 존재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씩씩대며 걷다가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반달이 꽤나 멋져 보였다. 그래,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다 그만두고 싶어 지더라도.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정치를 배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치워야지. 나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고, 난 다시 발을 뗐다. 


사실 아직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기분은 여전히 꿀꿀하고 찜찜하고 좀처럼 밝아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2시간 전에 본 그 반달이 풍긴 아름다운 하늘을 떠올리면, 조금은 내 기분도 게이 기도 한다. 


어쩌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해보자. 



 



Su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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