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숨 가쁜 오늘을 걷는 우리의 이야기
오늘은 달력의 마지막 한 칸, 11월의 스물 여드레, 평범함 속에 숨겨진 ‘마감(Closure)’이라는 이름의 전장이다.
아침 알람 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고, 서둘러 맨 넥타이 아래로 왠지 모를 전율이 흘렀다.
8시, 이미 책상에 앉아 오늘 하루, 실적이라는 숙명 앞에서 약속된 모든 숫자를 현실로 바꾸어내야 하는 전쟁 계획을 점검한다.
마감은 늘 숨 막히지만, 최근 몇 년의 채권 추심 환경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팍팍하다.
파산이나 개인회생, 신용회복워원회 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채무자들은 법의 보호막 속으로 숨어들었고, 불법 추심 규제가 강화되면서 우리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외줄 타기를 해야 한다.
예전처럼 ‘강하게’ 독촉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채무자의 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척하며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해야 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되었다. 분납금까지 한 푼도 놓칠세라 전화와 문자를 쉴 새 없이 돌리는 것이 오늘의 일과이다.
9시 정각,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윌(Will)’ 한 병.
오늘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는 동료가 남기고 간 작별 인사이다.
달콤한 음료는 잠시나마 이 씁쓸한 현실을 잊게 해 준다.
팀장님의 마감 아침 회의는 늘 단호하다.
"오늘은 마감입니다.
약속과 분납, 무조건 들어와야 합니다."
이어 부장님의 격앙된 목소리가 사무실을 휘몰아친다.
"경쟁사 다섯 곳 중 우리가 오늘 기준 꼴찌입니다.
최소한 2등까지는 올라가야 합니다!"
위급할 때만 등장하는 부장님의 강조는 이 마감일이 단순한 업무가 아닌, 우리의 생존이 걸린 싸움임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무실은 수십 대의 전화 통화 소리로 뒤덮인다.
희망과 절규가 뒤섞인 목소리는 11시 반, 점심시간이 오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마감일의 점심 식사는 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주로 회사를 떠나는 이들과 함께한다.
가벼운 관계는 짧은 식사로, 가까운 사이는 퇴근 후 소주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이별의 씁쓸함 속에서도, 마감 약속을 놓칠 수 없어 식사를 하면서도 통화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동료와의 쓸쓸한 작별을 커피 한 잔과 함께 마무리하고, 오후 1시, 우리는 오전보다 더 강력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오후의 통화는 더욱 격렬해진다.
"담당자님, 요새 법원에서 문자도 오고… 솔직히 저도 힘듭니다."
채무자의 이러한 호소는 우리에게 이중의 압박을 준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독촉하는 심적 부담과 함께, 민원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결국 회사의 실적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받았습니다!”
큰 건이 성사되어 약속금이 들어왔을 때, 담당자의 탄성과 함께 사무실 곳곳에서 진심 어린 축하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희망이 전염되는 순간이다.
이 '한 건'을 위해 얼마나 많은 규정과 심리적 장벽을 넘어섰는지 알기에 축하의 목소리는 더욱 크고 진실된다.
하지만 반대로, "다음 달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는 채무자의 통보가 전해질 때, 담당자의 깊은 한숨 소리는 공기를 가르며 주위를 잠시 침묵으로 몰고 간다.
한 달의 노력이 무너지는 순간의 고독이다.
특히 채무자가 '민원'을 언급할 때는 그 침묵이 더욱 길고 무겁게 내려앉는다.
오후 4시나 5시가 되면, 팀장님은 다시 팀원을 모아 놓고 마지막 최선을 다해달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바로 이때, 회사를 떠나는 서너 명의 동료들이 일일이 책상을 돌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실적 부진으로 스스로 혹은 회사의 권고로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점점 어려워지는 채권 회수 환경 속에서 버티지 못한 이들이다.
"다음 달부터는 타사로 옮겨 잘해보겠습니다!"
그들의 다짐 속에는 새로운 희망과 아쉬움, 쓸쓸함이 교차한다.
6시 정각, 부장님이 다시 등판한다.
"한 달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6시 이후는 자율 근무입니다."
이 말은 곧, 약속과 분납금이 미진한 이들에게는 29일과 30일까지도 쉴 수 없다는 무언의 명령이다.
숨 막히는 하루가 이렇게 일단락된다.
떠나는 이와 마지막 저녁을 함께하거나, 혹은 남은 팀원들과 한 달의 수고를 털어내는 소주 한 잔으로 길고 긴 마감일을 비로소 끝맺는다.
관리자들(팀장급 이상) 역시 그들 나름대로 모여 소주잔을 기울일 것이다.
'공은 관리사가 세우고 성과는 관리자가 품는다'
는 자조 섞인 말처럼, 필드에서 피땀 흘린 선수들 위에 그들은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관리사는 6개월마다 계약서를 새로 쓰는 '파리 목숨'이지만, 실적이 안 좋으면 그전에라도 회사를 떠나야 하는 잔혹한 현실이 우리의 모습이다.
마감일은 그렇게, 실적의 압박과 민원, 인간적인 만남, 그리고 떠남의 쓸쓸함이 교차하는 우리 삶의 작은 축소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이 쌓여, 우리는 또다시 다음 달을 향해 걷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