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맨스 랜드
오늘은 12월 7일, 일요일입니다.
창밖으로 어둠이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문득 제가 이제 반백을 넘어 60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 시점에서,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세월의 무게 때문일 것입니다.
12월은 참으로 특별한 달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주는 아쉬움과 함께,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겹쳐 떠오르는 달이기도 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12월에 새겨진 의미들이 더욱 깊이 각인됩니다.
따뜻한 김장의 기억부터 시작해, 어딘가 서늘한 12.12 사태의 긴장감, 그리고 설레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불빛까지.
그런데 작년 이맘때, 우리 모두를 얼어붙게 했던 또 하나의 사건이 12월의 역사에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12월 3일의 계엄 선포입니다.
2024년 12월 3일,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든 시간, 대한민국 국민들은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행정 명령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중히 지켜온 자유와 민주주의의 심장을 겨누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계엄이라는 것은 본래 나라가 전쟁 중이거나, 사회 전체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경찰력이나 행정력으로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때 발동하는 '최후의 비상 브레이크'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 우리 사회는 어떠했습니까?
국민들은 평화롭게 일터를 오가고 있었고, 거리는 평온했습니다.
국회에서 여야 간의 치열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것이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는 아니었습니다.
거리에는 총을 든 적군이 없었고, 건물이 무너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정치적 갈등'을 마치 국가비상사태인 것처럼 둔갑시켰습니다.
실체가 없는 위기를 조작하여, 가장 강력한 비상 권한을 남용한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계엄의 내용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모든 집회·시위를 금지하며, 언론과 출판을 사전 검열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국민의 주권을 정지시키겠다는 뜻과 같았습니다.
국민의 입과 귀를 막겠다는 언론 통제는 우리가 어렵게 쟁취한 표현의 자유를 송두리째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권력자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모든 이를 '통제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였습니다.
게다가 이 계엄은 국무회의 심의도 없이, 국회에 통고하려는 절차도 없이, 한밤중에 대통령 혼자 혹은 소수의 측근들과 밀실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국민들이 잠든 틈을 타 민주주의를 도둑질하려 한 것과 다름없으며, 법치주의의 기본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오만함이었습니다.
12월 3일 밤의 계엄선포는 '가짜 위기'를 조작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뼈아픈 권력 남용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대한민국은 격랑 속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억눌렸던 민주주의의 봄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 희망의 씨앗이 채 뿌리를 내리기도 전,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혼란의 중심에서 권력을 향해 가장 빠르게 몸집을 키우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수사권을 등에 업고 자신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사람들과 함께 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마치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그들은 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2월 12일 밤, 서울에는 겨울의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전두환 측 부하들은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붙여 정 총장을 강제로 끌고 가려했고, 이 과정에서 군대가 군대를 공격하는 총격전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습니다.
나라를 지켜야 할 최정예 부대들이 전방에서 빼내어져 밤중에 서울 도심으로 투입되었습니다.
탱크와 병력이 거리를 가로지르는 동안,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이미 권력의 판도는 뒤집혀 있었습니다.
이 승리 덕분에 그들의 불법적인 무력 행사는 형식적으로나마 합법의 외피를 두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12.12 사태는 군의 지휘권을 폭력과 협박으로 빼앗은 군사 쿠데타의 서막이었으며, 이는 이듬해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새로운 독재 정권을 세우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차가운 12월,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우리는 따뜻함과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100여 년 전의 어떤 12월은 가장 참혹했고, 동시에 가장 기적 같은 순간을 품고 있었습니다.
1914년 12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벨기에 이프르 근처의 서부 전선은 진흙과 피로 얼룩진 지옥이었습니다.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숨 막히는 참호 속에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참호와 참호 사이, 시신이 방치된 죽음의 공간은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라 불렸습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은 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독일군 참호 쪽이었습니다.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를 켠 불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이 들려왔습니다.
영국 병사들은 잔뜩 긴장했지만, 곧 망설이던 영국군 참호에서도 영어 캐럴이 울려 퍼지며 화답했습니다.
총성이 멈추고, 캐럴의 선율이 '노 맨스 랜드' 위를 부유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용기를 낸 독일 병사 하나가 무기 없이 참호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영국군 역시 경계를 풀고 '노 맨스 랜드'로 걸어 나갔습니다.
병사들은 진흙을 밟으며 서로에게 다가갔고, 잠시 후 적군은 따뜻한 악수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전쟁 전 직업을 묻고, 시가, 맥주, 초콜릿을 교환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같은 처지의 젊은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휴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즉석 축구 경기였습니다.
죽음의 땅이었던 '노 맨스 랜드'가 잠시나마 국경 없는 우정과 스포츠맨십으로 가득 찼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이 평화의 시간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사령부의 엄격한 명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병사들은 아쉬움 속에 다시 참호로 돌아가야 했지만, "우리는 오늘 다시 싸워야 하지만, 당신을 향해 조준하지 않을 것이오."라는 슬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은 인류가 스스로 만든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평화와 사랑에 대한 본능이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기록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갈등과 대립이 존재합니다.
100여 년 전, 총을 든 병사들이 서로에게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던 그 따뜻함이, 2025년 12월 우리에게도 작은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일상 속에서 잠시 총성을 멈추고, 따뜻한 캐럴을 나누고 싶은 '노 맨스 랜드'는 어디인가요?
온기가 따듯한 12월이 되길 바라며, 이 평화로운 기운으로 돌아오는 새해에도 바라시는 큰 뜻을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